“이 편지는 네게 이곳을 소개하기 위해 쓰였어.” 새 학교에 전학 온 소리(이수현)는 책상 서랍에서 한통의 편지를 발견한다. 동화스러운 비밀을 풀어헤치기 시작한 편지는 소리가 그다음 편지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마침내 낯선 장소와 새로운 친구들에게 가까워지도록 돕는다. 웹툰 원작의 애니메이션 <연의 편지>를 통해 처음 목소리 연기에 도전한 이수현과 <원펀맨><귀멸의 칼날><케이팝 데몬 헌터스>등에서 다채로운 얼굴이 되었던 민승우 성우는 이제 막 교실에서 벗어나 초록에 물든 이야기를 생명력 있게 완성했다. 외로움을 짊어졌던 소녀가 자기만의 방식대로 응답하듯, 두 성우는 시종일관 서로에게 귀 기울였다.
- 웹툰 원작 <연의 편지>는 역할이 정해지고 나서 읽었나. 캐릭터와 목소리를 매치하는 과정은 어땠는지.
이수현 원래 알던 작품이었고, 집에 책으로도 갖고 있다. 애니메이션 제작이 확정됐다는 소식만으로도 독자로서 너무 행복했다. 소리의 목소리를 맡게 된다고 했을 때 막중한 책임을 느꼈다. 내가 알던 소리라는 캐릭터에 어떻게 내 목소리를 입혀야 할지 고민이 컸다. 캐스팅이 확정된 후에 원작을 다시 읽으면서 어떤 톤이 좋을지 생각했다. 물론 혼자서 정한 것은 아니고 감독님, 보이스 디렉터와 상의해서 어떤 톤과 무게감으로 하면 좋을지 정했다.
민승우 원래 웹툰을 굉장히 좋아한다. 알고 있던 작품이었는데 캐스팅이 돼 더 좋았다. 우리는 퍼포머이기도 하지만 원작 팬으로서 내 취향이 들어가면 거기에 갇힐 수가 있다. 나 역시 내가 생각한 호연이를 준비했지만 내 색깔만 고집하면 (이)수현님의 목소리와 어우러질 수 없어서 오히려 많이 덜어내는 과정이 있었다. 극장판 애니메이션에서 더빙의 한계는 돌비 음향을 위해 서로의 호흡도 겹치면 안되기 때문에 전부 다 따로 녹음한다. 같이하면 정말 좋을 텐데 그럴 수 없어서 지휘하는 연출자를 믿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디렉션을 따랐을 때 당시에는 아쉬움도 남았지만 완성작을 보니 하모니를 잘 잡아주신 것 같아 작품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 녹음 작업은 순조로웠나 아니면 엄격하게 진행되었나.
민승우 정말 궁금하다. 나한테는 엄격하셨는데 수현님한테는 어떠셨는지. 농담이고, 녹음을 따로 해야 하는 현실과 환경을 알지만 수현님이 하는 연기의 톤 앤드 매너를 알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녹음 스케줄이 앞뒤로 이어져 서로 마주칠 기회가 주어졌다. 모르는 사이였는데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촬영 현장도 분위기가 좋으면 작품이 잘 나온다고 하듯 수현님의 온도가 전해져서 믿음이 더해졌다.
이수현 마지막 순번으로 녹음을 했다. 다른 성우 분들의 연기를 잘 들으면서 연기할 수 있도록 일부러 배려해주신 것 같다. 첫날 목이 안 풀린 상태로 하루 종일 열심히 했는데 나중에 그날 녹음 분량을 전부 다시 녹음하기도 했다.
- 보이스 디렉터에게 레슨을 받았다던데 레슨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이수현 보이스 디렉터 선생님에게 우쭈쭈하지 말고 내가 못하거든 혼내 달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잘 이해해주셔서 정말 많이 혼났다. (웃음) 레슨을 받다가 ‘수현씨, 이리 와보세요’ 하면 그때부터 선생님의 강의가 시작된다. 잘하면 계속 마이크 앞에 있을 수 있고, 자리에 앉아 있으면 못하고 있는 거였다. 초반에는 이름이 많이 불렸는데 나중에 덜 불려나가서 열심히 했던 만큼의 성과가 보인다고 생각했다.
- 애니메이션 더빙에서는 시선을 돌리는 장면에서도 음성이 필요하다. 연기와도 다르고 일상적인 대화와도 달랐을 텐데.
이수현 왜 다른 곳을 보는데 소리를 내지 싶을 정도로 일상에서는 쓰지 않는 음성이 많이 나오긴 한다. 애니메이션을 워낙 좋아하고 많이 봐서 ‘이런 식으로 흉내내면 되나’ 하면서도 그런 추임새들이 생각보다도 훨씬 많다. 목소리 연기가 아니라면 경험하지 못할 순간이라 신기하면서도 재미있었다.
민승우 시선을 돌리는데 소리를 내는 건 정말 이상하지만 직업 성우들도 경각심을 늦추면 나중에는 반응 소리가 전부 똑같아진다. 극장에서 보니 수현님의 반응 소리는 정말 다양하더라. 나 역시 한순간도 타성에 젖어서 연기하지 않으려 하는데 이 일을 많이 하다 보면 똑같이 나올 때가 있다. 감독님도 “방금 호흡 너무 생각 없이 한 것 같다”라고 여러 번 언급하셔서 조금 덜어냈더니 호연이가 전체적으로 담백해진 느낌이었다.
- 그럼 직업 성우들은 실생활에서도 그런 소리를 내기도 하나.
민승우 필요 없는 소리를 많이 낸다. 그렇게 연로하지 않았는데 앉거나 일어날 때 왜 자꾸 그렇게 소리를 내는지 모르겠고 물병을 여는데 왜 소리를 내는지 모르겠다. (일동 웃음)
- 연극영화과를 나왔는데 낯을 가려서 성우가 되었다고 들었다.
민승우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연극이나 스크린 연기에 도전해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즐겁고 행복하지가 않았다. 무대 위에서 내가 너무 모자랐던 것 같아 커튼콜을 할 때 뿌듯함보다는 죄송함이 더 컸다. 무대공포증일 수도 있는데 유독 관객 앞에 섰을 때 프로로서 보여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레코딩 환경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성우 연기가 내게 더 잘 맞았다.
- 뮤지션으로서 쌓은 경험이 목소리 연기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이수현 노래할 때 반가성을 쓰는데 내 분야에서는 자신이 있어서 더빙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더빙은 복식호흡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발성이라 완전히 달랐다. 갓난아기가 걸음마 배우듯 차근차근 배워야 했지만 감춰진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노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노래하는 사람으로 터득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두 가지 감정을 갖고 노래하는 거였다. 슬픔을 가진 채 기쁜 노래를 하는 것처럼 내면의 감정도 함께 표현해내는 데 오래 걸렸다. 이번 목소리 연기에는 정확히 이 부분이 필요했다. 노래를 하지 않았더라면 더 힘든 영역이었을 수도 있다.
- <연의 편지>는 학교라는 현실적인 공간과 설정에 판타지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이전에 연기했던 작품들과는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는 지점들이 있을 텐데 이 세계를 표현하면서 특히 신경 썼던 부분이 있다면.
민승우 목소리 연기를 할 때 이런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확실히 적긴 하다. 배역 중에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에서 산 아저씨 역할이 있었다. 아무래도 성우는 일상에서 벗어난 역할을 많이 맡는데 그렇다고 해서 <연의 편지>의 호연이를 환상적인 인물로 여기고 싶지는 않았다. 판타지가 우선이 아니라 학생의 마음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표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연의 편지>에서 현실적으로 말이 안되는 장면들조차 우습지 않았다. 굳이 이런 생각으로 따져보게 만들지 않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힘이 연기를 자연스럽게 받쳐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 걸 더 더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수현 내 경우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많은 것을 채워야 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채우고 싶다고 한들 어떻게 다 채울 수 있겠나. 열심히 담아내는 동안 잘 덜어내주셔서 중간지점에서 만나게 됐던 게 아닐까 한다.
- 편지를 낭송하는 신비로운 장면에서 소리에게 미션 편지를 줄 때와 동순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길 때, 같은 편지 낭송이어도 다른 두 수신자에게 전하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민승우 편지가 늘어가면서 정체가 드러날수록 아주 조금씩 인간성을 더해간다. 아주 조금씩. 호연은 처음에는 정체를 숨기는데 동시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인물이지 않나. 신비하게만 보인 존재였을 때와 달리 편지에 숨겨진 트릭을 알아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진다. 그래서 마지막이 가장 솔직한 정호연의 모습이다.
- 다른 사람이 노래를 부른 게 아닐까 했는데 연기와 노래 사이에 어떤 차별점과 연결점을 의도했나.
이수현 노래를 부르는 이수현으로 노래를 정말 잘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소리라는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해서 불러야 하는지 정말 고민이 많았다. 중간지점을 찾는 게 어려웠지만 목소리 연기를 할 때도 이수현의 목소리가 섞여 있기 때문에 내 본래 톤에 소리를 연기했을 때와 같은 감정으로 노래를 불렀다. 민승우 성우님도 이번 작업에서 많이 덜어냈다고 했던 것처럼 본업인 노래에서 나도 많이 덜어내려고 했다.
- <원펀맨>의 제노스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진우 등 전반적으로 신비로운 미형 캐릭터를 주로 맡아왔다. 호연 역에 낙점된 이유도 미성 때문이라고 하던데 본인 목소리의 어떤 지점이 힘 있는 목소리의 미형 캐릭터와 어울리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
민승우 <연의 편지>가 몇년 전 처음에 짧은 티저 PV로 제작했을 때 호연의 목소리로 아주 짧은 대사가 노출됐는데 그때 좋게 봐주셨던 게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 여파로 지지를 받았던 게 아닐까. 극장에서 봤을 때 내 연기가 완벽하지 않아 아쉬움은 늘 있다. 한국에 실력 있는 성우들이 너무 많아서 언제라도 위협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 그냥 운이 좋았다. 특별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지 않고 그때그때 열심히 하는 노력형, 생계형 성우라고 할 수 있다.
- 앞으로 시도해보고 싶은 목소리 연기가 있다면.
이수현 사람이 아닌 것의 목소리를 해보고 싶다. 보이스 디렉터도 성우의 연기에서도 가장 어려운 영역에 들어왔다고 말씀하셨다. 목소리를 변조해도 되는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가 오히려 저에게 더 쉽고 즐거웠을 수 있다고. 첫 단추를 심화 과정부터 끼웠다는 걸 알게 되니 다른 장르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민승우 비인간 캐릭터를 연기하는 건 정말 재밌는 작업이다. 춤을 못 추는 사람에게도 탈을 씌우면 과감해지는 것처럼 마치 인형 탈을 쓴 듯 의지할 도구가 생겨서 마음껏 신나게 날뛸 수 있다.
- <연의 편지>의 목소리 연기 작업은 무엇을 남겼고, 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
민승우 무엇을 남겼냐면 수현님과 작업한 필모그래피를 남겼다. 진심이다. 어느 직업이든 연차가 쌓이면 고착화되고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영역이 있다. 수현님이 시간을 몇십배를 써서 열심히 하는 모습이 굉장히 신선한 자극이 됐다. 오늘의 대화에서도 수현님에게 많은 것을 얻어간다. 성우 이수현과 함께했던 특별하고 소중한 필모그래피로 남을 것 같다.
이수현 매우 영광이다. 내 소감도 비슷한데 정말 잘 살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너무 감사하다. 지금 한국에서 제일 멋진 여러 성우 분들과 어떻게 내가 나란히 할 수 있겠나. 귀하게 받은 이 기회를 잘 잡아서 진심으로 임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음악만큼이나 진지하게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국 애니메이션 작품이 앞으로도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여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