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일본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운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이하 <무한열차편>)은 코로나19로 인해 할리우드 대작이 사라진 한국 극장가를 강타했다. 5년 뒤인 2025년에 공개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하 <무한성편>)은 일본에서 개봉 8일 만에 100억엔을 돌파하고, 한국 극장가에서도 개봉 1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이런 흐름이 단발적인 현상이 아님을 입증했다. 이를 이뤄낸 것은 도쿄의 대형 제작사가 아닌, 지방 도시 도쿠시마를 거점으로 한 중형 스튜디오 유포테이블이었다.
변방이었기에 가능했던 ‘자립’
이를 계기로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는 것이 도쿄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애니메이션 제작 체제와는 선을 그은, 지방에 거점을 둔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이다. 교토부 우지시에 설립된 교토 애니메이션은 본래 인근의 주부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태생부터 수익성보다는 직원 복지를 우선하던 이 회사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인 창작 역량을 키운 결과, <스즈미야 하루히> <케이온> 등을 히트시키며 업계에 돌풍을 일으켰고, 이후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넷플릭스를 통해 글로벌로 확장될 수 있었다. 도야마현 난토시에서 설립된 피에이웍스(P.A.Works)는 자신들의 거점인 도야마현을 배경으로 한 <꽃이 피는 첫걸음>을 히트시켜 애니메이션 팬들의 성지순례 붐을 만들고, 이어 <트루 티어즈> <글로스립> 등 도야마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연속으로 히트시켜 지역 제작사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이들은 또한 애니메이션 제작 현장을 배경으로 한 작품인 <시로바코>를 히트시켜 ‘도야마현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냈다.
지금은 <귀멸의 칼날>로 일본 굴지의 제작사로 등극한 유포테이블은 본래는 도쿄에서 시작했지만 2009년에는 도쿠시마에 스튜디오를 개설하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애니메이터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였다. 수익이 그다지 좋지 않은 애니메이터들에게 도쿄의 거주 환경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기에 어차피 애니메이션 작업에 전념한다면 생활비가 저렴하고 주거 환경도 더 좋은 지방이 나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방으로 이전한 스튜디오가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과제는, 본래의 애니메이션 제작 중심지인 도쿄와 물리적인 거리가 떨어져 있기에 애니메이션 제작의 모든 과정을 자체적으로 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포테이블과 교토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의 작화, 원화, 동화, 배경, CG 작업 등 거의 모든 제작 과정의 자체적 수직계열화에 성공했으며, 이는 작품의 퀄리티 컨트롤에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유포테이블은 이에 더해 도쿠시마에 캐릭터 카페와 극장을 운영하며 캐릭터 굿즈도 직접 생산, 판매하고 있으며 한국 홍대에도 직영 캐릭터 카페를 두고 있다. 교토 애니메이션은 일찍부터 교토 지역에서 애니메이션 굿즈 사업을 운영했으며, 자체 소설 브랜드를 론칭해 이를 직접 애니메이션화하는 판권 수익 극대화 모델을 만들었다. 피에이웍스는 이들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지역 고용 활성화 및 지역 관광 사업과의 제휴로 지역 친화적인 사업모델 구축에 성공했다. 이러한 모델의 공통점은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직접 사업을 운영하며 팬들과 접촉한다는 것인데, 이는 기존의 ‘제작위원회’ 시스템에 묶인 중소형 제작사들이 수익 사업의 대부분을 스폰서들에게 내주고 자신들은 애니메이션 제작비만 겨우 챙기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과는 상당히 다르다.
코로나19와 OTT 시대가 가져온 ‘기회’
전세계를 휩쓴 코로나19의 광풍은 기존의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을 거의 멈추게 만들었다. 많은 부분을 외주나 분업으로 진행하던 도쿄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협력 업체들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기존의 제작위원회를 이끌던 스폰서들은 매출에 직접적인 타격이 오자 투자를 망설이게 되면서 애니메이션 업계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대도시에 비해 코로나의 피해가 비교적 적고, 이미 내부적으로 수직계열화가 어느 정도 이뤄져 있던 지방 제작사들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비교적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또한 코로나로 대부분의 즐길 거리를 잃은 사람들이 OTT로 몰려들면서 애니메이션의 수요는 오히려 이전보다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공개된 TV시리즈 <귀멸의 칼날>은 다른 제작사들의 신작 발표가 연기되는 틈을 타 단기간에 화제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며 최고의 타이밍에 OTT 시장을 장악했다. 이는 <귀멸의 칼날>을 단기간에 세계적인 히트작으로 만든 것은 물론, 이어지는 극장 공개를 대성공으로 이끄는 단초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극장가 역시 할리우드영화 등의 제작이 멈추며 콘텐츠 공백 상태가 이어졌는데 여기에 등장한 <무한열차편>은 거의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던 극장가를 압도적인 퀄리티로 장악하면서 일본 박스오피스 역대 1위를 차지하며 국민 애니메이션의 자리에 등극한다. 이렇게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활용하며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엔 유포테이블이라는 제작사가 지방을 거점으로 자립적인 제작 환경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교토 애니메이션 역시 <바이올렛 에버가든>을 통해 한발 먼저 넷플릭스에 진출했지만 테러 사건으로 인해 창작 역량이 크게 꺾이는 바람에 유포테이블처럼 커다란 기회를 움켜잡지 못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포스트 <귀멸의 칼날> 이후의 싸움, 지방 콘텐츠 기업의 ‘과제’
유포테이블은 현재 다른 프로젝트를 모두 동결해가며 회사의 모든 역량을 <귀멸의 칼날> 시리즈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 3부작으로 기획된 <무한성편> 극장판을 제작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고, 그 후에는 현재 애니메이션 제작이 동결된 중국산 초대형 IP <원신>과 <공의 경계>를 통해 지금의 유포테이블을 만들어준 타입문(TYPEMOON)의 작품들이 대기하고 있다. 현재 유포테이블의 제작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무한성편>에 대부분의 역량을 쏟아낸 나머지 이후 작품의 동력마저 소진될 위험성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유포테이블에 있어 지금의 <귀멸의 칼날>도 중요하지만 <귀멸의 칼날> 이후를 위한 역량 역시 계속해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교토 애니메이션은 테러의 여파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남아 있던 기존의 인재들이 독립해서 나가는 등 다시 한번 리빌딩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특히 유포테이블이 거둔 성공은 과거 교토 애니메이션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이끌었던 전성시대를 떠올리게 하면서, 이들에게 다시 한번 자극을 주게 될 것이다. 피에이웍스는 이 둘과는 달리 아직 애니메이션 업계의 정점에 올라서 본 적도 없고, 제작 시스템의 수직계열화 등에 있어서도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지방 제작사로서의 정체성을 정착시키는 데에는 이미 성공한 만큼 앞선 두 회사를 모델로 한 더 큰 성장이 기대되고 있다.
현재의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지방을 중심으로 한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부상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물론 수많은 인재와 자원이 모여드는 도쿄와 지방 사이의 격차 역시 엄연히 현실이기도 하다. 이들 지방 제작사들이 장기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아직까지는 한정적인 IP를 더욱 다각화하고, 현재 보유하고 있는 제작 시스템의 자립성을 보강하는 한편, 지방 회사이기에 가능했던 직원 복지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다. 이후 이들을 본받아 다른 지방에서도 많은 중소 제작사들이 탄생하여 성공을 거둔다면 지금의 일본 애니메이션 붐은 더욱 오래, 그리고 탄탄하게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도 애니메이션만이 아닌, 다양한 콘텐츠 분야에서의 지방 제작사의 가능성을 돌아보게 할 계기가 될 것이다.
유포테이블 트리비아
도쿠시마 거점 유지
유포테이블은 본래 도쿄에서 설립되었지만 애니메이터들의 근무, 생활환경 개선과 지역 상생을 위해 2009년 도쿠시마에 스튜디오를 열었다. 이후 지역 축제인 ‘아와오도리’의 포스터를 그리게 된 것을 계기로 전국의 애니메이션 팬들이 해당 축제에 몰려드는 등 대성공을 거둔다.
<공의 경계> 7부작 실험
유포테이블을 본격적인 성공 가도에 올린 애니메이션 <공의 경계>는 원래 3부작으로 계획되었으나 “원작자의 감정을 영상으로 담아야 한다”라는 지침에 따라 7부작 극장판으로 확장하는 강수를 두었다. 유포테이블은 이 작품을 계기로 신인감독을 육성하고 소규모 극장판 흥행의 수익모델을 확립하는 등 이후의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타입문과의 협업 강화
유포테이블은 타입문의 <공의 경계>로 성공 가도에 오른 이후에 게임 <페이트>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지속적으로 제작하며 창작 노하우를 축적, 액션 작화 브랜드를 확립했다.
자립 전략
지방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그 여건상 대부분의 제작 공정을 외주 등을 최소화하며 자사 내부에 소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유포테이블은 그중에서도 가장 앞서 나간 경우로, 작화 관련 이외의 사운드, 3D, VFX, 합성까지 자체 인력을 활용하며 외주 의존도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또한 카페나 상영관 등 부가 사업까지도 직접 운영하면서 거의 완벽한 수직계열화를 달성했다.
리스크 관리 능력 부족
급속한 과정에서의 리스크 관리가 문제시되고 있다. 지난 2021년에는 세무 논란으로 회사가 조사를 받는 등 경영상의 리스크 관리가 문제가 되었으며, 현재 <무한성편> 제작에 스튜디오 전체가 올인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과도한 집중과 소모로 인한 리스크가 지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