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일 수밖에>는 김대환 감독이 <철원기행>과 <초행>에 이어 만든 가족 소재의 영화다. 감독 스스로도 장편영화 세편을 ‘가족 3부작’이라 묶은 바 있지만 이 트릴로지의 종장엔 전작과 달리 제목에 ‘행’(行)이 붙지 않는다. 김대환 감독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정하(장영남)의 비밀뿐만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자기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목이 비밀일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비밀일 수밖에’와 ‘비밀’일 수밖에 없다는 중의적 의미로 해석되는 감독의 말을 들으니, 영화가 품은 이중성을 속속들이 물을 수밖에 없었다.
- 스스로 가족 3부작을 완결하겠다고 밝힌 이후 탄생한 영화다.
<철원기행>은 아버지 그리고 이혼, <초행>은 동 세대 그리고 결혼을 다루었다. 이제 남은 건 어머니 그리고 재혼이었다. 시나리오를 구상하던 중 요즘 시대에 재혼이 별일일까 싶었다. 고민하던 중 자녀를 출산한 후 커밍아웃한 어느 여성의 기사를 읽게 됐다. 그분을 취재하며 이런 재혼 서사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소수자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들의 시점을 염두에 둔 채 시나리오를 썼다.
- 작중 인물들은 사소한 진실을 비밀로 두지만 이들의 거짓말은 줄곧 바로 다음 장면에서 들통이 난다. 비밀이 연쇄적으로 폭로되는 이야기 구조를 어떻게 짜나갔나.
캐릭터의 이중성이 맞붙으며 숏을 덧붙여가면 서사의 재미가 살아날 것 같았다. 이 이야기는 ‘쿨’이 멋있다고 여겨지던 때 떠올렸다. 스스로 쿨하다고 말하는 사람조차 자기 가족에겐 쿨하지 못하다. 그 양가성이 영화 안에서 드러났으면 했다. 이를테면 정하는 진보적인 교육관으로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걸 다 하라”며 독려하지만 아들 진우(류경수)는 자신의 교육관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 전작들의 일관된 형식이었던 원신 원컷의 숏 구성이 이번 작품에선 두드러지지 않는다. 거의 처음으로 컷의 분할을 시도한 이유는.
늘 무엇이 가장 효과적일까를 고민한다. <초행> 의 경우 수현(조현철)과 지영(김새벽) 커플과 함께 관객이 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길 바라는 마음에 원신 원컷을 택했다. 반면 <비밀일 수밖에>는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 중 관객이 누구에게 이입할지를 정할 수 없었다. 가닿을 수 있는 지점의 선택지를 열어놨다고 해야 할까. 그런 효과를 고민하며 컷을 구상했다.
- 세 작품이 쌓이니 김대환 감독이 그리는 가족구성원끼리 유사한 도상을 공유한다는 인상이 든다. <비밀일 수밖에> 속 문철(박지일) 또한 가부장적인 독선을 내세우지만 자기만의 페이소스가 있다. 그 페이소스가 가족 모두의 공감을 못 살 뿐이다.
분명히 해두자. 문철은 우리 아버지와는 다르다. (웃음) 세 영화의 아버지 또한 전부 다른 남자들이다. 다만 그들 사이에 무언가가 겹친다면 그건 세대에 기인한 문제 아닐까. 문철은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특정 집단의 특색을 녹여내려 했다. 혐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한없이 어리석다가도 안타까워진다. 왜 그들은 타인의 존재를 지우고 증오하는 일에 저리 필사적일까.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공존해야 하는데 제발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 일찍 아버지를 여읜 진우는 문철과 불화하는 제니(스테파니 리)에게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라는 말을 건네기도 한다. 문철과 진우의 아버지를 대칭꼴로 그린 이유는.
진우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사람에 가깝다. 고향 춘천의 공무원, 당시 교직 사회가 굉장히 폐쇄적이었고, 그 문화가 아이들에게까지 내려갔다.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려면 특정 고등학교에 가야 했고, 교복이 곧 그 학생의 성적을 방증했다. 계급화된 고등학교는 또 부모에게로 올라가 자녀의 고등학교 진학 여부가 낙인이 됐다. 그럴수록 가장이 강압적으로 변한다. 그게 어떤 의미든 가장이 리더십을 발휘해야 자녀를 성공적으로 양육할 수 있다는 환경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고 말이다.
- 영화의 주인공인 정하는 분쟁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갈등을 중재하고 상황을 봉합하는 데 애를 쓴다. 엄마로서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이기도 하고. 정하를 통해 표상하려는 인간상이 있었나.
정하가 학생들에게 줄곧 말하는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는 대사가 중요했다. 우선 본인이 얼마나 갈등했겠나. 진우가 유학을 간 후 연인이며 동반자인 지선(옥지영)이 생겼으니, 그 시간 동안 자신이 학생들에게 뱉은 말의 의미를 충분히 숙고하고 결론을 냈을 것이라고 보았다.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사는 게 쉽지 않다. 그렇게 살기 위해 모두가 정하처럼 고생한다.
- 정하가 모든 위기를 단 하루에 겪어야 할 당위성은 어디에서 찾았나. 정하에겐 너무 잔인한 하루인데.
문철이 만든 소동은 우발적인 사고에 가깝다. 하지만 정하에겐 가혹하다. <비밀일 수밖에>는 사고 그다음을 말하는 영화다. 영화 속 비밀은 반전이 아니다. 비밀이 밝혀진 이후의 변화가 중요하다. 정하의 비밀로 인해 진우와 제니가 변한다. 그 계기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정하에게 잔혹한 순간이 필요했다.
- 진우가 한국에 오면서 모든 사건이 벌어진다. 이야기의 도화선이 되는 캐릭터인데 진우는 매 순간 절실하다. 여자 친구와 어머니를 보듬고 싶고 후회할 일도 만들지 않으려 애쓴다.류경수 배우와 워낙 친하다. 그가 다양한 작품에서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내 눈에 비친 경수는 눈망울이 얼룩말 같은 친구다. 육식동물로서의 류경수가 아닌 다른 면을 보여주고 싶어 그에게 진우 역을 맡겼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정하의 집은 내부와 마당, 안채와 별채 등 구획이 명확한 장소다. 그런 만큼 공간이 갖는 의미를 정확히 세웠을 듯한데.안과 밖이 정말 중요한 개념이었다. 진우와 제니, 문철과 하영(박지아)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 집은 정하와 지선만의 보금자리였다.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 공간이었다. 내부에선 단단하고 오손도손한 행복을 누리는 공간을 외부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며 불편함이 촉발된다.
- 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를 세편째 만들었다. 할 만큼 했다고 보나.
이젠 다른 영화를 만들고자 한다.
- 전작과 이번 작품 사이에 귀여운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에서 아버지로 자리 이동을 하며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기도 했나.
나는 가정 내에서 공동 양육자인 동시에 주부다. 어쩌면 한국에서 관습적으로 기대하는 아버지의 역할과는 다소 다를 수 있겠다. 사회가 으레 기대하는 역할 수행에서 벗어난 셈인데, 거기에서 오는 괴리가 존재한다. 일례로 아들 또래의 어머니들이 만든 공고한 커뮤니티에 편입되기가 쉽지 않다. 나는 그들로부터 어떤 팁이라도 듣고 싶다. (웃음) 육아가 삶에 들어오면서 작업 패턴과 이야기를 쓰는 시점이 변했다. 이전까지는 아들의 시선에서 위 세대를 바라보는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아들 세대를 바라보는 영화를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이러한 시선의 변화는 너무 내 자아를 반영하는 것 같아 경계하는 중이다. 당분간 가족 소재의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이유와도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