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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명과 암 - XR 이머시브 전시 ‘비욘드 리얼리티’를 체험하다
김소미 사진 최성열 2025-07-16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부천영화제)의 XR 이머시브 전시인 ‘비욘드 리얼리티’는 국내외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가상현실 작품을 선보이는 프로그램으로 올해 10회를 맞이했다. 쓰레기 소각장을 예술 전시 공간으로 재생시켜 39m 깊이의 지하 공간이 주는 깊이감으로 압도하는 부천아트벙커B39가 그 무대다. 전시 작품 수는 약 25편으로 지난해보다 규모는 줄어들었으나 AI와 XR의 결합을 중심에 두고 AI 기반 스토리텔링 작품, 생성형 AI+XR 워크숍 결과 전시 등에 집중했다. 2016년 국내 영화제 중 최초로 VR 영화를 소개하고 XR(VR, AR 등 체감형 확장현실) 분야를 조명한 부천영화제는 이제 단순한 가상 체험을 넘어 AI와 알고리즘이 개입하는 창작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XR은 수용의 제약이 분명한 관람 형태다. 관객들은 사전 예약을 하거나 현장에서 대기 명단에 이름을 등록해두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영화제 운영 측면에서나 관객의 편의 면에서는 확실히 비효율적인 이 프로그램은, 그러나 기다림의 가치를 확인시켜준다. 올해는 XR과 생성형 AI의 접점이 더욱 노골화되어 흥미로운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음성을 통한 교감, 사전 설문 등을 통해 관람자가 적극적으로 이미지 생성에 가담하도록 만드는 작품들이 관객을 공동 창작자의 자리로 초대한 것이다. 매체와 관객을 연결하는 동력은 관람자의 감정과 기억을 불러들이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많은 작품들이 생의 중요한 추억, 애도 과정, 내면의 여정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스크린의 관객이 전통적으로 이미지와 교류하며 얻어온 감정의 효과를 기술 혁신과 결합시키고자 했다. XR과 AI의 존재 증명 방식이 인간 향수를 극대화하는 아이러니 사이에 몇몇 인상적인 작품들이 자리했다. 발리 푸글랭 감독의 <트레이스: 애도의 프로세서>는 관객이 자신의 애도 경험을 프로그램에 기입하고 ‘의식 수행자’의 안내에 따라 몽환적인 숲속을 걷도록 한다. 이때 한 사람이 아니라 다중 사용자가 참여함으로써 관객들은 서로를 지각할 수 있다. 잃어버린 존재에 대한 감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마주하게 하는 이 작품은 연결감 측면에서 생생한 체험을 안긴다.

박억 감독의 <‘너’스탤지어>는 AI 기반의 인터랙티브 콘텐츠로 관객의 구술에 따라 이미지가 생성된다. 15분가량 진행되는 이 작품은 잊혀진 기억을 VR로 재구성해내는 데 목적을 둔다. 관객은 가능한 한 구체적이고 성실하게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데, AI의 퍼포먼스를 위해 수행해야 할 응답 과정이 인터랙티브를 일방향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은 고민해볼 지점이다. 영화라기보다는 AI 기반의 몰입형 공연 전시에 부합하는 결과물들이 지금 XR과 AI가 결합한 작품들의 도착지로 보인다.

내면의 원체험을 극대화하는 데서 매력을 발휘하는 작품들은 프랑스가 선두에 있다. 시몬 푸니에와 빈센트 루이예르스 감독이 만든 <변화의 예술>은 한 여성이 자신의 인생을 아우르는 시간의 맥락 속에서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는 명상적 여정을 따라간다. 시작은 작은 방 안. 일기장과 책상 위의 포스트잇 메모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어느 책상의 주인이 되어서 천천히 정신적인 탐구를 시작한다. 방문이 열리면, 관객은 앞으로 밀려 나가거나 위로 떠오르는 등 실감나는 공간 체험을 경험하면서 약 10분간 광활한 우주 위를 유영하게 된다. 내러티브는 단순화하고 몰입감을 극대화한 포맷으로, 현시점에서 XR 기술과 예술성을 결합한 체험의 정수에 가까운 작품이다. <변화의 예술>은 몰입형 미디어 고유의 문법이 분명히 혁신에 다가서고 있으며 이 발전이 영화보다는 이머시브 게임을 대체하는 매체 경험이 될 것이라는 데 확신을 갖게 한다. 프랑스 마르크 샤갈 국립미술관의 초청으로 샤갈의 회화에서 영적이고 상징적인 요소들을 체험적으로 재구성한 제레미 그리포의 <언더 더 스카이> 역시 몰입형 멀티미디어의 동시대적 조류를 체감시켜준다.

한국 작품으로는 이승무, 송영윤 감독의 <플라이 투 유>가 한국전쟁에 얽힌 여성의 한을 유령적 이미지로 풀어내면서 강렬한 체험을 안겼다. 비극 속에서 가족과 이별하게 된 여성의 내면의 자취를 좇는 이 작품은 역사적 상처를 이미지로 감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14분의 단편 VR로, 올해 상영된 한국 작품 중에서는 단연 뛰어난 완성도를 선보였다. 목포 출신의 정은실 감독이 만든 <파시>는 지역성을 해석한 작가의 관점에 이머시브 미디어적 상상력을 더한 작품이다. 2인조 펑크 밴드 무키무키만만수의 멤버에서 VR, 게임 스토리텔러로 활동 반경을 넓혀가고 있는 작가의 다음 행보를 궁금하게 만든다. 올해 한국 작품 중 유일하게 애플 비전 프로를 통해 무용 퍼포먼스를 관람할 수 있도록 한 혼합현실(MR) 미디어 <하얀 문>은 유상현 감독이 펼치는 일종의 디지털 놀이로 단일 전시로서의 확장성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XR이란?

XR은 HMD(Head Mounted Display) 디바이스를 착용하여 현실을 완전히 새로운 3D 디지털 공간으로 대체해 새로운 그래픽의 세계로 몰입하게 하는 기술이다. 가상현실(VR) 기술을 중심으로, 증강현실(AR)과 혼합현실(MR) 등을 모두 통합해 더욱 발전된 기술을 접할 수 있게 하는 개념을 말한다. 부천영화제는 영화제가 끝난 뒤 올해 11월에도 주한 프랑스대사관 문화원과 함께하는 국제 디지털 문화 축제인 ‘디지털 노벰버’ (Digital November)를 개최해 XR 전시를 이어간다.

AI 영상은 과연 ‘영화’를 진흥시킬까?

올해 부천의 XR 전시에는 AI 기술을 작품 표층에서 더욱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들의 존재감이 돋보였다. 이는 환상영화학교를 필두로 한 교육·제작·상영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AI 영화 플랫폼으로 거듭나겠다는 영화제의 포부를 반영한 것이다. 부천영화제는 2024년 국내 최초로 AI 영화 국제경쟁 부문인 ‘부천 초이스: AI 영화’를 도입하고 AI 국제 콘퍼런스, 워크숍 등을 연 바 있다. 이후 AI영상교육센터부천을 설립해 AI 영화 제작 워크숍을 상설화하고 단편·중편(옴니버스)·AI+XR 융합 콘텐츠 제작 과정 등도 새롭게 추가했다. 2025년 영화제에 앞서 5~6월에 열린 AI+XR 단편영화 제작 워크숍에선 4주간 집중 트레이닝과 팀별 멘토링을 거쳐 런웨이(Runway), 스테이블 디퓨전(Stable Diffusion), 유니티/언리얼(Unity/Unreal) 등 생성형 AI와 실감형 기술로 탄생한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AI 포럼에 참가하고 신진 AI 창작자들의 활동을 접한 다수의 관객, 관계자들의 중론은 회의적이다. 1만명 양성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AI 산업 인력 창출에 집중한 부천의 고민이, AI 기술이 영화의 본질적 가치에 기여하는 바와는 괴리가 있다는 점에 문제의식이 맺혔다. 생성형 AI가 XR과 게임 영역에서 관객의 인터랙티브를 돕고 광고 및 상업적 용도의 영상 작업 효율을 극대화할 것은 분명한 장점으로 보인다. VFX 기술과의 시너지도 이미 그 효력이 입증되고 있다. 하지만 AI 기술이 스크린 영화의 진보를 담보하거나 혹은 영화관 밖에서 영화를 대체할 만한 독자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부천영화제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유효한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전반적인 영화제 운영 상황이 예년보다 다소 축소된 상황에서 주력 프로그램인 AI 영화의 실질적인 결괏값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더욱 아쉬운 행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