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가 티빙과 웨이브의 임원 겸임 방식 기업결합을 조건부 승인했다. 2024년 11월 CJ ENM과 SK스퀘어가 티빙과 웨이브의 단계적 통합을 위해 2500억원대의 전략적 투자를 실행한다고 밝힌 지 반년여 만이다. 공정위가 이번 사안을 심의하면서 중점적으로 검토한 쟁점은 세 가지다. 첫째, 소비자가 부담해야 할 구독료가 인상될 우려가 있나. 둘째, 티빙이 속한 CJ가 티빙 혹은 웨이브에만 콘텐츠를 공급해 경쟁 OTT가 콘텐츠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할 우려가 있나. 셋째, 웨이브가 속한 SK가 이동통신 및 IPTV 서비스에 OTT 서비스를 끼워 팔아 경쟁 OTT를 배제할 우려가 있나. 결과적으로 공정위는 수평결합에 따른 요금 인상만이 염려된다고 판단, 2026년 말까지 티빙 및 웨이브가 기존 요금제를 유지하거나 통합 서비스 출범 시 기존 가격대와 유사한 요금제를 출시하라는 시정조치를 부과했다. 이는 ‘기업결합 시정 방안 제출 제도’를 활용하여 행태적 조치를 부과한 첫 사례다.
공정위 발표 이후 양사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6월16일 티빙과 웨이븐느 최대 39% 할인된 가격대의 ‘더블이용권’을 내놓았다. 하나의 구독권으로 두 플랫폼의 콘텐츠를 모두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나아가 웨이브는 7월부터 9월까지 매주 목요일에 <라이프 온 마스> <타인은 지옥이다> 등 총 45편의 OCN 작품을 제공한다. 지난 3월부터 총 100편의 CJ ENM 영화를 공개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2024년 기준 넷플릭스에 이어 각각 국내 이용자 수 2위, 4위, 이용시간 순위 2위, 3위를 자랑하는 OTT 플랫폼인 티빙과 웨이브. 각자 C와 지상파 방송사 콘텐츠 라이브러리를 확보했다는 강점으로 구독자를 불러모았지만 효율과 가성비를 따지는 유저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둘이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왔다. 바람에 응답하듯 2023년부터 합병 소식이 들려왔지만 티빙의 지분 13.5%를 보유한 2대 주주 KT스튜디오지니가 합병에 줄곧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난관이 있었다. 하지만 공정위의 조건부 승인까지 떨어지면서 이제 합병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다”
전략적 파트너십 체결한 방문신 SBS 사장, 강동한 넷플릭스 한국 콘텐츠 부문 VP(왼쪽부터).
흥미롭게도 다수의 영상·콘텐츠 업계 리더들은 현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특히 제작자들은 유의미한 변화를 기대하기보다 침착하게 할 일을 모색하는 인상이다. “티빙은 기본적인 콘텐츠 플랜을 가동해왔지만 웨이브는 콘텐츠에 대한 투자를 멈춘 지 몇년이 지났기에 가치가 하락했다.”(제작자 A) “웨이브가 업계에 영향력이 없다시피 했다. 솔직히 합병을 하거나 말거나 관심이 안 간다.”(제작자 B) 국내 OTT 시리즈와 영화 모두 제작한 경험이 있는 제작사 대표 A, B씨는 물론 한 드라마 제작사 PD도 동일한 의견을 내비쳤다. “시청자는 분명히 편해질 것이다. Apple TV+도 구독했지만 Apple TV+ 오리지널 작품이 티빙에 들어오니 티빙으로 보는 게 편하더라. 티빙, 웨이브에 있는 작품이 넷플릭스에도 있다면 넷플릭스에서 보지 않나. 그러니 나부터도 티빙이나 웨이브 하나만 구독하고 싶었다. 그런데 두 회사의 합병이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들은 애초에 웨이브의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고 강조하며 “1 더하기 1은 2가 아닌 1”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냥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제작 기회가 축소될 수 있어 걱정이라는 제작자들도 있었다. 여러 방송사 및 국내외 OTT와 영화·드라마를 공동 제작해온 제작사 대표 C씨가 그랬다. “1 더하기 1이 1이 되면 제작 기회가 오히려 줄어드는 모양새 아닌가. 제작비 규모 면에서도 국내 OTT가 글로벌 OTT와 경쟁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국내 OTT의 해외 스트리밍이라는 숙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배우들도 글로벌 OTT를 선택할 것이다.” 이는 제작자 A씨도 공감한 대목이다. “스타 배우들은 전부 넷플릭스로 가고 싶어 한다. 편성을 논의하다가 넷플릭스가 아닌 다른 플랫폼에 갈 수도 있다고 언급하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다. 제작사들이 가운데서 고생이다.”
티빙-웨이브 합병에 관해 <씨네21>과 대화를 나눈 업계 종사자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두 국내 OTT가 힘을 합쳐도 넷플릭스의 대항마가 될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넷플릭스 시리즈를 만든 제작사 대표 D씨조차 아쉬움을 표했다. “그들만의 성격이 또렷한 OTT들이 꽤 있었다. 왓챠의 경우 취향이 확고한 유저들이 마니악한 작품을 볼 수 있는 창구다. 티빙은 프로야구 관련 콘텐츠를 독식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래서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을 지켜보며 시너지효과가 예상된다기보다 코로나19 이후 OTT 업계에 끼었던 버블이 꺼지는 것 같다고 느낀다. 넷플릭스 1강 체제가 계속될 듯하다. 이렇게 되면 콘텐츠 시장이 보수화될 수 있다. 넷플릭스가 1인자로 굳어진 후에는 그들이 초반에 보여준 신선한 시도들을 찾아보기 힘들지 않나.” 더군다나 지난해 12월 넷플릭스는 SBS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SBS 신작 및 기존 프로그램을 국내 넷플릭스 회원들에게 제공하고, SBS 신작 드라마 중 일부를 전세계에 동시 공개한다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SBS는 넷플릭스, MBC와 KBS 콘텐츠는 티빙-웨이브로 양분되는 현실이 티빙-웨이브에 마이너스 요소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넷플릭스 독주가 장기화되리라는 전망에 이어 일각에서는 결국 합병의 최대 수혜자가 CJ라 보고 있다. “티빙은 원래부터 자신들이 투자한 콘텐츠를 집중 홍보해왔다. 그리고 그 콘텐츠 대부분이 tvN에서 방영한 것들이었다. 앞으로 tvN이나 지상파 방송사에서 방영되지 않은 콘텐츠들은 플랫폼에서의 노출, 홍보가 점점 어려워지지 않을까.” 한 뉴미디어 업계 관계자의 예측이다. 제작자 B씨도 끄덕였다. “스튜디오드래곤, CJ 스튜디오스처럼 CJ ENM 산하에서 탄생하는 작품만 커버해도 티빙은 잘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국내 최대 플랫폼으로서 다양성을 유지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다양성이라는 화두
OTT 지형도가 교묘하게 재편되고 있는 가운데 업계인들은 어떤 대책을 강구 중일까. 올해에만 OTT 시리즈와 장편영화를 연달아 공개한 제작자 B씨는 앞으로도 “OTT 드라마, TV드라마, 영화, 숏폼 콘텐츠까지 네 가지 트랙”을 유지할 것이라 전했다. “한쪽에 편향된 제작 시스템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 넷플릭스 시리즈를 제작했던 D씨는 제작 단가와 콘텐츠 색깔을 들어 계획을 말했다. 그는 넷플릭스가 한국 콘텐츠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저렴한 일본과 태국 시장에 집중한다는 소문이 무성한 데다 영국도 한국에 비해 훨씬 낮은 단가로 <베이비 레인디어> <소년의 시간> 같은 히트한 영어 콘텐츠를 생산해내고 있으니 넷플릭스의 시야에서 한국 콘텐츠의 효용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실정을 설명한 뒤 덧붙였다.
“디즈니+의 <쇼군>이 에미상을 휩쓰는 등 반향을 일으켰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도 한국이 제작한 작품은 아니지만 글로벌화된 로컬 문화를 활용해 인기를 끌었다. 이제 억지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맞추려는 노력보다 한국적이면서도 해외에서 열광할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 아닐까. 나 또한 피자, 파스타가 아닌 잘 만든 된장찌개, 청국장 같은 콘텐츠를 세계에 내보일 수 있는 기획을 구상 중이다.” 뉴미디어 업계 관계자는 시각을 플랫폼 차원으로 확대했다. “한국은 인구 대비 광고 집행력이 떨어지는 나라다. 파라마운트+나 Apple TV+가 한국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해외 플랫폼이 들어올 가능성도 적다. 이제는 한국 시장을 레버리지 삼아 팬아시아(panAsia)를 염두에 둔 플랫폼이 나와야 하지 않나 싶다. 한국에서만 무언가를 얻어내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한편 티빙-웨이브 합병에 따른 갑론을박과 거리를 둔 채 자기 정체성을 수호하고 있는 군소 OTT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넷플릭스 1강, CJ 독과점이라는 키워드가 거론되고, 그로 인해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재차 화두에 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캐치! 티니핑> 시리즈 제작사 에스에이엠지엔터테인먼트가 운영하는 키즈 전용 OTT 이모션캐슬시네마, 수입사 M&M 인터내셔널이 운영하는 아트하우스 OTT 콜렉티오나 각각 일본 애니메이션, BL 콘텐츠에 특화된 라프텔, 헤븐리 등이 그 예다. 타깃을 명확히 한 이들은 지난해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작품을 보려면 VPN을 우회하는 방법 등을 쓸 수밖에 없었던 관객이 국내에서도 양질의 작품을 합법적으로 볼 플랫폼을 원했다”고 밝힌 이동영 M&M 인터내셔널 공동대표의 소망을 공유하는 셈이다. 국내 OTT 시장 활성화 초기부터 자리를 지킨 왓챠의 사례도 있다. 양치우 왓챠 마케팅 이사는 “이용자간의 소통과 연결을 강화하는 플랫폼으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기존 OTT에서 볼 수 없던 기능과 재미 요소를 추가하고 이용자들의 경험 확장에 주력하고 있다”며 방향성을 제시했다. “대표적으로 ‘왓챠파티’는 단순히 실시간 채팅과 음성 코멘터리 등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콘텐츠를 즐기며 새로운 커뮤니티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를 통해 과거 콘텐츠의 재조명, 팬덤 형성, 오프라인 상영회 등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아우르는 경험 확장을 실현하고 있다.” 플랫폼간 이합집산이 본격화되고 있는 지금, 콘텐츠 본연의 매력을 넘어 사용자 경험 자체를 고민하는 OTT만이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