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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을 남길 바엔, 그리워 아픈 게 나아, <오징어 게임> 시즌3
송경원 2025-07-10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린 말이 아니야. 사람이야, 사람.” 결국 이 대사가 하고 싶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정확히는 기훈(이정재)의 입을 통해 이 도덕적 딜레마의 명제를 내뱉는 그림을 만드는 게 최종 목적지였던 것처럼 보인다. 이 대사는 무엇을 증명했는가. 아기를 살리기 위해 자살하는 기훈의 행동은 저 말의 의미를 뒷받침할 수 있는가. 어쩌면 말은 입 밖으로 발화되는 순간부터 일정 부분 거짓에 물들 운명을 타고난다.

<오징어 게임> 시즌3에서 개연성이 휘발된 이유

기훈은 ‘오징어 게임’에 다시 돌아온 순간부터 시스템과 대결을 벌인다. 비슷한 길을 이미 걸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프론트맨(이병헌)은 기훈을 시험했던 시즌1의 오일남처럼 그가 양심을 버리고 시스템의 길을 걷기를 끊임없이 종용한다(동시에 자신이 걷지 못했던 길을 걷는 기훈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시스템은 이들의 인간성을 완전히 집어삼키지는 못했고, 몇몇 참가자는 비이성적인 행동들을 하며 시청자의 답답함(과 오버랩되는 분노)을 유발한다. <오징어 게임> 세 번째 시즌이 시청자의 속을 답답하게 만든 부분은 비극적인 엔딩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정해진 비극, 잔혹한 질문을 꺼내기 위한 무대를 배치하는 방식에 있다.

어쩌면 <오징어 게임> 시즌3는 서사적 개연성을 포기해야 성립하는 가치들을 전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해한다. 한편으론 그게 비극과 운명을 다룬 서사의 본질이니까. 참가자들이 게임(혹은 시스템)이 요구하는 대로 움직이는 말이 아니라 선택을 통한 자유의지를 증명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이 잔혹한 게임의 존재 이유다. 정확히는 잔혹한 게임을 아이디어 삼아 이야기를 창조한 자가 지키고 싶은 가치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기훈이 스스로 수차례 증명하듯 의도가 꼭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징어 게임> 시즌3의 최대 패착은 기껏 쌓아올린 캐릭터들을 정해진 목적대로 움직이는 체스 말처럼 쓰고 소비한다는 데 있다. 창조주의 납득하기 힘든 한수를 본 시청자들은 답이 정해진 딜레마 앞에서 의외의 선택을 하는 인물들의 행동을 인내하며 외칠 수밖에 없다. 저게 말이 돼?

위대한 작가들이 종종 밝히는 창작의 비밀 중엔 캐릭터에 생명을 부여하는 방식이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세계와 상황을 구축하면 인물들이 저절로 살아서 움직인다고 말한다. 개연성이란 그런 것이다. 캐릭터가 약속된 세계의 규칙하에서 스스로 움직일 때 발생하는 행동 원리. 반면 <오징어 게임> 시즌3는 정해진 길의 강박을 놓지 못한 채 결정적인 순간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체스판 위의 말처럼 캐릭터를 정해진 위치로 가져다놓는다. 대표적으로 준희(조유리)의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결말은 이미 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죄 없는 순수한 아기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 바깥의 압력에 의해) 누구도 해칠 수 없는 존재로 보호받는다. 급기야 금자(강애심)가 남의 아기를 지키기 위해 아들 용식(양동근)을 희생시킬 때 캐릭터들은 장님이 되길 강요받는다. 서사 바깥의 대의로서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정작 캐릭터 각자의 목적도, 지난 과거도, 심지어 감정마저도 지워지는 셈이다.

미련을 남길 바엔, 그리워 아픈 게 나아

그런데 캐릭터가 살아 있는 인물이 아니라 서사적 기능으로 납작해지는 이 순간, 묘한 일치가 발생한다. 금자의 선택을 본 VIP는 외친다. “여기서 처음 만난 여자와 아기를 살리겠다고 자기 아들을 죽였다고요.” 시청자의 마음의 소리를 도파민 중독자 같은 VIP의 입을 통해서 들을 때, 거꾸로 누군가는 매트릭스에서 깨어날 기회를 얻는다. 우리가 이 거대하고 자극적인 쇼를 관람 중인 위치가 VIP들과 같을지도 모른다는 자각. <오징어 게임>에서 합리와 이성의 영역에 선 캐릭터들은 결과적으로 납득이 되는 선택을 한다. 초지일관 맞는 말만 했던 프론트맨이나 도시락 작전이라는 희대의 게임 파훼법을 제시한 100억남 임정대(송영창)의 선택에 따랐다면 아무 소득 없는 파국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일관성 없이 갈팡질팡하는 캐릭터 때문에 지금까지 벌인 모든 행동이 쓸모없어졌다고 느낀다면, 전체 이야기와 겉돌며 도시 어부 찍는 황준호(위하준)처럼 쓸모없는 캐릭터들이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한다고 느꼈다면, 당신의 분노는 정당하다. 동시에 <오징어 게임>이라는 거대한 이벤트는 쓸모와 합리성이 무의미해진 자리에서 의미를 발생시키는 이율배반적인 면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요컨대 이 이야기는 애초부터 말도 안되게 망해야 할 운명에 내몰렸다.

<오징어 게임>은 결과의 합리성과 과정의 정당성을 저울에 놓고 벌이는 게임이다. 한쪽에는 어쩔 수 없다며 시스템에 적응한 프론트맨이 있고, 다른 쪽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인간성을 좇아 최악의 선택만 반복하는 기훈이 있다. 프론트맨과 100억남 같은 이들은 시스템의 구멍을 발견하고 공략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철저히 시스템에 순응하는 존재다. 혹은 시스템 안에서 최적의 선택을 한다. 반면 기훈은 시스템을 공격하고 뒤집고자 한다. 능력도 머리도 부족해 최악의 결말에 이르렀지만, 적어도 자신의 패착을 합리화하진 않는다. 그게 설령 시청자의 불쾌감을 유발한다 할지라도 마지막에는 도파민에 중독된 ‘게임’ 이상의 행동을 통해 사람다움을 지키야 한다. 그게 오징어 게임 내에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다. 시즌3의 기훈은 좌절과 분노에 눈이 멀어 사냥감처럼 대호(강하늘)를 뒤쫓고, 명분을 잃은 후에는 그저 게임을 파괴하는 트롤링을 반복하지만 그 실패야말로 이 자극투성이인 쇼의 유일한 명분인 셈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징어 게임> 시즌3는 스스로 부정하고 싶었던 거대한 게임의 일부로서 자본의 지시에 따른다. “우린 말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외쳐봤자 이미 성공한 속편이 캐릭터를 소비하는 방식은 철저히 인물을 기능으로, 혹은 체스의 말로 사용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벗어나지 않는다. 다시 한번, 거짓에 물들 운명을 타고난 말보다는 보이는 걸 믿을 수밖에 없다. 거꾸로 게임의 치밀함과 캐릭터 각각의 사연이라는 ‘과정’보단 희생과 인간성이라는 ‘주제’, 그러니까 결론에 맞추기로 결심한 순간 디테일로부터 피어나는 공감은 차례로 허물어질 운명에 처했다.

한국 전통놀이에서 모티브를 따온 <오징어 게임> 시즌1은 K콘텐츠의 판도를 바꾼 게임 체인저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하지만 세계로 확장되는 가운데 결국 시스템의 벽을 미처 부수지 못한 채 멈췄다. 이제 더이상 K라는 타이틀이 중요해지지 않은 프로젝트를 넘어 아예 K를 지워야 할 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좋겠다. 이윽고 바통을 새로운 무대의 <오징어 게임>에 넘겨주기 위한, 일종의 징검다리이자 거대한 PPL로서의 역할로 소비되어버린 속편은 운명이 지정한 대로 자발적 실패, 캐릭터에 대한 실감과 사연에 대한 공감보다는 장대한 주제에 천착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됐다. 미련을 남길 바엔 뒤돌아볼 것도 없을 만큼 깔끔하게 불살라버리고 싶었던 걸까.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가슴으로 동조하긴 어려웠던 종착지를 마주하며 K컬처가 생명력을 이어가는 방식에 대해 새삼 고민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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