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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과 이름을 얻었다, <봄밤> 강미자 감독 인터뷰
김소미 사진 오계옥 2025-07-08

삶에 앓아본 이라면 누구든 품고 있는 눈물. 끝없이 넘실거리는 그 물이 마침내 흐르는 자리에서 강미자 감독은 어느 연인의 행로를 따른다. 그리고 사랑과 죽음의 태연한 동맹을 바라본다. 감독을 포함해 스태프 6명, 서울과 제주도를 오가며 촬영한 이 영화엔 저예산 프로덕션에 가해지는 현실의 중력을 거스르는 어떤 초현실적인 힘이 있다. 표현적 이미지와 암전 등을 동원해 시적 리듬으로 구조한 영화 <봄밤>의 기원을 듣기 위해 강미자 감독과 만났다.

- 하나의 포스터 같은 이미지로 타이틀시퀀스를 구성했다. <봄밤>이지만 눈길의 이미지 위에 붉은 글씨로 ‘봄밤’이란 글자가 놓이는데.

타이틀 컷은 영화 편집을 끝내고 제목을 어떻게 넣을지 고심하는 과정에서 만들었다. 보통은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고들 한다. 하지만 겨울 다음에 봄이 되는 시간의 순차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저 길 끝에 봄이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겨울 가면 오는 게 아니고 수환(김설진)과 영경(한예리)이 걷는 길 끝에 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봤던 것 같다.

- 결혼식 후 피로연 장면에서 수환과 영경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고 잠들어 있다. 초현실적인 장면화 이면에서 감독이 추구한 바를 들려준다면.

두 사람은 세속의 시선에서 보면 사회의 틀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이지만, 나는 오히려 영경과 수환이 서로를 얻는 그 운명적인 순간에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렇게 꾸려진 셋업이다. 이 장면에서 수환과 영경이 처음 서로를 보고 이름을 물어봐준다.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얻는 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름을 묻고 대답하고 불러주는 순간에 가장 집중해서 얻어낸 컷이다. 서울에서 아침에 결혼식장 장면을 찍고 잠시 해산했다가 밤에 다시 모여서 찍은 것인데, 그날 밤 편집을 하면서 ‘오늘 나는 이름과 눈물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이후에 두 사람이 술집에서 대화하는 장면이 기다리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제는 두 사람이, 그리고 이 영화가 자기 힘을 가지고 진행될 수 있겠구나 싶더라.

- 결혼식장을 보여주기 전에 영경이 머물던 여관 앞 입구 전경이 툭 나왔다가 사라진다. 영화 후반에 영경이 요양원에서 외출해 머무는 곳이다. 이 숏을 도입부에 넣은 이유는.

시나리오에서는 첫컷이 아니었지만 편집 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이미지라 생각해 구성적으로 배치했다. 영경이 요양원을 나오고,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편의점에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나와서 목련나무 앞에서 시를 외는 밤이 있다. 어스름을 지나 어둠 속에서 여관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그 길은 영경의 밤의 여정이 고이는 장소이고, 비유적으로는 영경이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 권여선 작가의 원작 단편소설 <봄밤>은 수환과 영경이 살아온 이력을 서술하고 주변 인물들의 시점도 다룬다. 두 사람이 만난 세월도 12년으로 명기했다. 반면 영화 <봄밤>은 오직 두 인물에 집중해 첫만남부터 요양원 생활까지 하나의 꿈처럼 살아내고, 영화에만 존재하는 장면들도 생생하다. 소설을 ‘압축’했다는 표현은 적확하지 않은 것 같다. 시나리오 구상과 편집 단계에서 어떤 기조를 갖고 구조화했나.

이야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영경과 수환에게서 느꼈던 감정의 깊이, 색과 폭을 영화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표면적으로는 어떤 단순함이 필요했다. 소설에는 영경의 언니들, 수환의 가족이 나오지만 오직 두 사람에만 집중한 이유다. 영화 <봄밤>에 담긴 인물들의 감정은 12년의 생활을 연대기적으로 통과한 시간의 결과물 같은 것이 아니었으면 했다. 12년 전이나, 12년의 중간, 12년의 후, 혹은 그 이후의 어떤 시간에도 고스란히 존재하는 감정의 원형을 생각했다. 나 역시 소설의 시간을 압축한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고 본다. 차라리 무한의 시간, 거기서 닿는 영원 같은 것을 그렸으면 했다.

- 편집에서 절제를 넘어선 어떤 단호함도 감지된다. 한예리 배우는 앞선 인터뷰에서 전하길, 긴 세월 편집감독으로 일한 이의 몸에 밴 과단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많은 컷을 들어냈다. 영경이 수환에게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어주는 신이 대표적이다. 소설이 언어를 통해 전달한 것이 시각을 통해 전달하는 영화에서는 다르게 와닿는 부분이 있더라. 둘의 차이를 새삼 실감했다. 이미 외출 후 돌아온 영경과 수환이 부대끼는 신에서 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영화가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말로 다시 풀어내자 설명이 되어버렸다.

- 2003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편집 수업 강사로 일하고 있다. 2007년부터 드라마 편집일도 지속해왔는데.

아마 영상원 최장수 시간강사가 아닐까. (웃음) 학생들과 영화 편집을 이야기해온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오직 고마움만 느낀다. 드라마 편집 역시 감사한 일이다. 10부작, 16부작 되는 길이의 작업에 일정 기간 모든 것을 쏟아서 해냈을 때 느낄 수 있는 성취감이 있다. 그런 몰입이 귀하다.

- 장편 데뷔작 <푸른 강은 흘러라> 이전에 1998년 단편영화 <현빈>을 만든 것이 첫 출발점이다. 긴 세월을 관통하면서 결코 영화를 떠나지 않았는데.

실험 단편이었던 <현빈>은 여성으로서의 내 무의식을 찬찬히 들여다보기로 하면서 1년 동안 꾸었던 꿈을 기록하는 데서 출발한 영화다. 대사도 하나 없고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가 과연 무엇인가 스스로도 궁금함을 갖고 작업했다. <봄밤> 후반작업을 거치면서, 잊고 있었던 <현빈>이 떠오른 적 있다. 이미지에 대한 고민이나 구성 면에서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현빈>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긴 세월 동안 영화작업을 계속 이어오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내 안에 어떤 영화적인 원형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느 날 그런 것을 느꼈을 때 다시 한번 감사했다. 혼자 되뇌었던 기억이 난다. 놓지 않고 있었구나, 최초의 무언가가 아직까지 흘러오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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