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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짓의 시간 - <봄밤> 한예리, 김설진
김소미 사진 오계옥 2025-07-08

배우이자 무용가로서 캐릭터에 스며든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뒹구는 몸짓 속에서 시(詩)처럼 흔들렸다. 배우 한예리는 장편 데뷔작 <푸른 강은 흘러라>(2008) 이후 강미자 감독과 십수년 만에 다시 만나는 이 작품을 <미나리>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을 무렵 과감히 선택했다. 벨기에 현대무용단 피핑톰을 거쳐 안무가, 연출가로도 활약하는 현대무용계의 스타 김설진은 드라마 <빈센조> <세자가 사라졌다> 등을 거쳐 <봄밤>으로 첫 장편영화 주연에 이름을 올렸다. 죽음 앞에서 사랑을 시작해보는 <봄밤> 속 연인처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사랑의 의미를 담담히 읽어낸 한예리와 김설진이 나눈 대화를 전한다.

한예리, 김설진(왼쪽부터).

- 두 사람의 인연은 언제 처음 시작됐나. 같은 학교 출신의 무용가이자 배우가 한 영화로 만났다.

김설진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입학 동기다. 내가 서울예술대학교를 졸업하고 그다음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시 1학년으로 들어갔다. 나는 무용원 창작과, 예리 배우는 전통예술원.

한예리 친구를 따라 토요일마다 창작과 수업을 듣는데 거기서 설진 배우를 만났다. 그때 같이 조그맣게 작업도 했었고.

김설진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웃음) 그러다 내가 해외에서 일하고 돌아오니 어느새 배우가 되어 있더라.

- 두 사람 모두 무용수이자 배우로서 넓은 틀에서 연기와 공연, 매체와 무대예술을 포괄해온 아티스트다. 한예리 배우가 미쟝센단편영화제로 처음 이름을 알리고 본격적인 배우업을 제안받았을 때 꽤 고심했던 것으로 아는데 이후 김설진 배우가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하려 할 때 도움을 주기도 했을 것 같다.

김설진 처음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그 시점의 고민을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예리가 매체 데뷔 후에도 공연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양쪽을 오가는 가운데 발생하는 차이에서 적응하는 방식이 특히 궁금했다.

한예리 근데 크게 도움이 못 되지 않았나? (웃음) 내가 단편영화 작업을 하는 동안 설진 오빠는 오히려 해외 무용단(피핑톰 등)에서 배우로서 탐구를 지속해온 것이니까. 몸으로 표현한다는 원초적인 지점은 결국 같다. 말은 이후에 따라오는 것 같다. 그래서 몸으로 더 예민하게 표현할 수 있는 부분들, 대사가 오지 않아도 상대의 몸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부분을 잘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

- 한예리 배우는 강미자 감독의 첫 장편 <푸른 강은 흘러라>로 함께 장편영화에 데뷔했다. 16살 연변 소녀 숙이에서 시작해 <봄밤>에선 삶의 고락을 통과한 40대의 영경이 됐다. 강 감독과의 재회는 어떻게 결심했나.

한예리 강미자 감독님의 시작과 함께했으니 거의 16년 만에 돌아온 두 번째 제안도 함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감독님이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해서 더더욱 시작과 끝을 함께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고. 그러고는 시나리오를 읽는데 수환 역을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 깊은 고민에 빠졌다. 분장 없이 배우가 실제로 혹독한 체중 감량을 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 그 밖에 많은 신체적 표현들까지 다 맡아줄 수 있는 배우가 있을까 고심하다가 감독님에게 설진 배우 이야기를 드렸다. 처음에 직접 설진 오빠에게 연락했을 때 반쯤 염치없다는 마음으로 말을 꺼냈는데, 흔쾌히 합류해줬다.

김설진 나로서는 함께하게 된 것에 그저 고마웠다. 이 작품을 만난 것도, 예리 배우와 호흡을 맞추는 것도.

- 작품 준비하고 촬영하는 동안 혹독한 체중 감량을 했다.

한예리 <봄밤>을 작업하는 동안 살을 많이 뺀 상태에서 계속 술 마시는 연기로 물을 들이켜다보니 굉장히 힘들고 예민해진 상태였다. 설진 오빠가 큰 의지가 됐다. 설진 배우는 심지어 드라마 촬영과 병행했으니 더 고생했을 거다. 막상 체중 감량을 했는데 작품 배경이 겨울이라 두꺼운 옷을 입으니 몸이 가려졌다. 의상, 분장팀 없이 어떻게 하면 캐릭터의 상태를 더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도 있었다.

김설진 빈속에 폭음하는 연기를 위해 계속 물을 들이켜다보면 탈이 난다. 그걸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어떻게든 더 아픈 얼굴이 되어야겠다 싶어서 수분 섭취를 최대한 줄이고 몸을 더 푸석하게 만들었다.

- 김설진 배우는 고향인 제주에서 영화를 찍었는데.

김설진 부모님, 친척들이 영화 촬영을 구경하러 오고 싶어 해서 현장에 못 오게 말리느라 혼났다 아주. (웃음) 결국 촬영장이 아니라 숙소에 오셨지만.

한예리 그래도 제주도에 머무는 기간 중 설진 배우 부모님도 한번 뵈어서 좋았다.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 아니셨을까.

이런 사랑도 있다

- <봄밤>에는 작지만 파장을 일으키는 몸짓들이 있다. 이를테면 도입부의 영경은 술을 먹다 곧잘 머리를 쿵 박고 쓰러지곤 하는데.

한예리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영경을 수환이 데려다주면서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설정에 부합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결혼식 장면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초현실적인 충격에 어울리는 듯한 몸짓이라 나 역시 좋았다. 감독님도 약간의 충격파를 원했던 것 같다. 일종의 결혼 피로연인데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잠들어 있잖나. 두 사람이 죽음 앞에서 사랑을 시작해본다, 그런 느낌이 과감하고 강렬하게 드러나는 장면이었고 영경의 몸짓도 거기에 부응한다. 시나리오에 쓰인 것보다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던 순간이다.

- 두 사람이 함께 요양원에 입소한 후, 영경이 외출을 나갔다가 취한 몸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있다. 길가에 나와 기다리던 수환도 휠체어에서 내려와 기어간다. 김설진 배우가 프레임 안으로 몸을 휙 날리는 과감한 순간은 마치 하나의 안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임했나.

한예리 수환이 영경을 발견하고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의지하려 했다. 영경은 본인의 상태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는 쪽이 더 자연스러울 테니까. 배우로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내 몸이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이든, 또 어떻게 쓰러지든 설진 배우가 잡아주리란 믿음이 있었다. 온전히 믿었다. 사전에 약속을 하거나 합을 맞춘 건 아니다. 테이크도 몇번 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김설진 기다리던 영경이가 오고 있네, 그런데 곧 넘어질 것 같다, 내가 가서 보호해주고 싶다, 그런데 몸이 마음대로 안되네, 그래도 가고 싶다, 어떻게든 안아주고 다치지 않게 해주고 싶다. 정말 그런 생각만 하면서 나아갔다. 오직 그 순간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찍다가 순간에 몰입하게 되면서 감독님이 한번은 수환이 눈물을 흘렸으면 좋겠다는 디렉션을 주셨다. 그때 내가 수환이 류머티즘 합병증으로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설정이 있지 않느냐고 감독님에게 반문했다. “수환은 못 울잖아요” 하고. (웃음) 그리고 나는 수환이 너무 슬퍼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봄밤>은 슬프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다.

- 극 중 인물들이 감상에 젖지 않기 때문에 슬픔이 더 말갛게 드러난다.

한예리 그 부분에 대해서 감독님과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나는 <봄밤>을 아름다운 멜로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설진 배우에게도 “이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라고 말했다. 영경은 자신이 수환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그들은 이해하고 있었다. 영경은 살다보니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울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냥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그저 해나가고 있다.

- 영경은 마신 만큼 운다. 그 눈물에는 한 사람의 역사가 담겨 있겠지만 원작 소설에서도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감정조절장애라는 자조적 묘사를 더한다. 영화를 촬영하는 배우에게도 마찬가지 작업이었을 것 같다. 특정 대화나 상황의 맥락 속에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우는 장면’을 촬영하는 순간들이 더러 있었을 텐데 어떤 과정이었나.

한예리 정말 그랬다. 당시에 나 자신이 많이 우울하거나 슬픈 것도 아니었고 그저 영경으로 지낸 시간들이 쌓여 있으니 그것에 자연스럽게 실려가려고 했다. 복잡한 감정으로 슬픔이 차오를 때는 오히려 눈물을 조금 참게 된다. 그런데 영경의 눈물은 그것과 달랐다. 울려고 마음먹고 소리도 내면서 울다보면 생각보다 눈물이 잘 난다. (웃음) 세팅 자체에서 오는 어려움은 크게 없었던 셈이다. 원체 잘 우는 타입이기도 하고. 영경을 둘러싼 슬픔에 대해 생각할 때 일부러 심플하게 접근한 것도 있다. 너무 많은 감정의 레이어들을 쌓다보면 오히려 표현에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다.

- 수환의 등에 업힌 영경의 모습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포개진 두 사람은 행복했을까.

한예리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영경이가 수환의 등에 업힌 순간만큼은 행복하기를,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에 깃드는 화사함 같은 게 피어나기를 바랐다. 수환에게 떼도 쓰고 귀여움도 받고. 그때만큼은 불행해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김설진 수환의 마음엔 이런 거라도 해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그래서 행복하다는 감정이 생기지 않았을까. 아직까지 해줄 수 있어 참 다행이라고 느끼는 순간을 지나 조금씩 몸 상태가 나빠지면서 업는 게 점점 버거워진다. 갑자기 어느 한순간이 떠오르는데, 한번은 내가 예리 배우를 보면서 ‘이 사람을 업을 수 있을까?’ 하고 두려움이 생기는 거다. 그런데 막상 업고 나니 영경이 곧 날아갈 것 같았다. 그가 정말로 가벼워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무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람이 날개를 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느꼈을 때 내가 조금은 수환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예리 그래서 더 이상 영경을 업어주지도 못하게 되었을 때 수환의 좌절감은 엄청났겠지.

김설진 술을 마시러 병원 밖으로 나가는 영경을 놓아준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건강을 위해서라면 말리는 게 맞다고 인식하고 있겠지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것밖에 없어서. 영경을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수환의 방식으로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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