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세계는 그곳에 진입했다는 이유만으로 더이상 전과 같을 수 없다. 만화잡지 편집장이 극장용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합류한 순간이 그렇고, 요란한 세상에서 우직하게 자기 생각을 관철하는 애니메이션영화를 본 순간의 관객들이 그렇다. 빗자루를 타고 날 수 없는 마녀, 엄마와 아빠가 돼지가 되어버린 여자아이, 인간을 사랑한 해양생명체, 숲을 지키는 경계심 높은 투사, 엄마를 병상에 둔 어린 자매…. 스튜디오 지브리 세계관은 세상의 결핍을 딛고 선다. 그 결핍으로 빚어진 주인공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이 어떻게 다른지 구분하게 한다. 동시에 희망도 준다. 자연과 공동체, 양심과 윤리, 미움과 사랑이 인간사에 얼마나 순수한 연료가 되는지 이 심지 굳은 스튜디오가 꾸준히 보여줬다. 일본 애니메이션 잡지 <아니메주> 전 편집장이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오랜 친구, 그리고 스튜디오 지브리 초창기 멤버인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와 함께 오래된 시간을 되돌아봤다. 종국엔 선한 것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견고한 믿음을 손에 쥔 이만이 되짚을 수 있는 신념이 공명을 일으킨다.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모노노케 히메> <천공의 성 라퓨타>까지 약 20년 전 개봉한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들을 차례대로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당시 어린이였던 지금의 2030세대 대부분은 세 작품을 처음으로 극장에서 만난다. 다른 사람과 함께 몰입하는 극장 경험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 영화들은 처음부터 대형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극장 관람이 OTT 스트리밍 감상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스크린 외의 요소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스스로 영상을 멈추거나 재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자체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만큼 자의적·타의적으로 영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 바로 몰입감이 쏟아진다.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하고 이야기 전개에 마음이 흔들리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영화적 경험이다. 지브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극장 안에 있기 때문에 이번 재개봉도 큰 의미가 있다.
- 다큐멘터리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에 출연하여 과거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어줬다.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흥행 실패를 맛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혼란스러워하며 “이제 뭘 해야 할까”라고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에게 물었을 때, “만화 연재를 해보라”고 답했다. 그렇게 시작한 작품이 바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다. 무수한 창작물 중 오히려 ‘움직이지 않는’ 만화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게 권한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제작은 기획서를 작성하고 투자사를 모집한 후 스태프를 모으는 등 많은 수고와 노력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그에 비해 만화는 혼자서 묵묵히 책상 앞에 앉아 그려나가는 작업이다. 거대한 세계관의 SF 작품이라도 종이와 연필, 펜만 있으면 자기만의 속도로 모든 것을 창조해낼 수 있는 훌륭한 창작 수단이다. 이런 과정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 믿었다. 일본은 전쟁 직후 데즈카 오사무로 대표되는 스토리 만화가 큰 인기를 끌었고 오랫동안 가장 친숙한 미디어로 자리 잡았다. 더불어 만화 작업은 영상화할 때에도 캐릭터 설정, 미술 설정, 레이아웃 작업에 크게 도움이 된다.
- <아니메주>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도 그를 조명하려 애쓴 매체다.
당시 미야자키는 <미래 소년 코난>과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을 만든 사람으로서 열성적인 팬들에게 지지를 받았지만 대중적인 관심을 받진 않았다. 1980년대 초반 일본은 로봇이나 메카가 활약하는 SF 애니메이션이 대세였고, 미야자키가 잘하는 이른바 만화영화 스타일의 작품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원래 애니메이션은 움직이기에 재미있는 예술이다. 나는 잡지 판매가 설령 줄어드는 한이 있더라도 공고히 다져진 유행에 균열을 내고 싶었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를 중심에 내세운 기획을 진행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 특집호의 실판매부수는 절반으로 떨어졌다. (웃음)
- 창간호부터 <아니메주>와 함께해온 사람으로서 전시에서 가장 반가웠던 부분은 무엇인가. 그동안 잊고 지냈지만 전시를 통해 다시금 소환된 기억이 있다면.
<아니메주> 초대 편집장인 오가타 히데오의 공로를 다시 돌아보는 것. 이 지점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그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아니메주>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 애니메이션 그랑프리가 다뤄진 것도 무척 신났다. 한해를 결산하는 독자 인기투표는 오가타가 처음 제안했지만 모든 편집부원이 땀 흘린 자산이다. <아니메주>가 없었다면 스튜디오 지브리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는 물론이고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도 <아니메주>와 지브리는 처음부터 하나로 이어진, 같은 길 위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 <아니메주>에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연재된 시간은 무려 12년 정도다. 연재 과정 중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가장 어려워한 부분이 있었다면 무엇인가.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고민을 함께 나눴을 듯하다.
미야자키 감독에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연재 과정에서 다음 이야기를 빨리 그리고 싶지만 그 와중에 본업인 애니메이션영화를 작업해야 했던 것이다. 영화제작을 마치고 나서도 머리를 전환하는 데 시간이 걸려, 좀처럼 연재를 재개할 수 없었던 상황에 꽤 힘들어했다. 그런 날에 미야자키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정확히는 생각나지 않지만, 내가 이따금 상식적인 이야기나 시시한 세상 이야기를 일부러 건넸던 기억이 난다. 한밤중에 만화를 그리다 혼자 내면으로 파고드는 그를 환기해주고 싶었다.
-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과 함께한 스튜디오 지브리 창립 초기 당시 세 동료가 가장 많이 논의했던 지점은 무엇인가.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에서 “스튜디오 지브리는 고정된 비전을 세우는 방식으로 열심히 일하는 회사는 아니”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두 감독은 오랫동안 TV애니메이션을 작업해왔지만 그보다 장편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어 했다. 애초 스튜디오를 설립한 것도 <천공의 성 라퓨타>를 제작할 거점이 필요해서였다. 원대한 목표나 장기적인 꿈, 비전 같은 것을 최우선으로 내세웠던 기억은 단 한번도 없다. (웃음) 스튜디오가 지금까지 계속될 수 있었던 건 두 사람이 동시에 ‘지브리를 그만두자’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태프를 정직원으로 채용하고, 제작위원회 방식으로 함께하는 회사가 늘어나고, 지브리 미술관이나 파크를 만든 덕에 사회적인 책임감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쉽게 그만두자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지금은 미야자키 고로 감독을 비롯한 젊은 세대의 스태프들의 손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
- 많은 젊은 창작자들은 여전히 지브리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창작한다. 2023년 개봉했던 <스즈메의 문단속>에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게 헌정하는 오마주 장면이 많고, 많은 한국 애니메이터들도 애니메이션을 시작한 계기로 지브리 작품을 꼽는다. 스튜디오 지브리가 지닌 ‘시간의 불변함’, ‘타임리스함’은 어디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나.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웃음) 다만 지브리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볼 수 있는 양질의 선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왔다. 세상의 유행이나 마케팅 같은 것을 중요 요소로 고려한 적이 없다. 그래서이지 않을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작품이 낡아 보이지 않는 것은.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에 부는 바람, 다시 말해 세간의 분위기나 시대의 흐름을 잘못 읽지 않으려 항상 노력한다. 나도, 미야자키도 항상 의식하고 있다.
- 문득 아주 작은 질문이 생겨났다. 스튜디오 지브리 전체 작품 중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의 최애작은 무엇인가.
미야자키 감독도 나도 과거의 작품은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보다 앞으로 만들 작품만을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 슬슬 작품 제작에서 은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꼭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이웃집 토토로>. (웃음) 캐릭터만 나오고 스토리가 전혀 떠오르지 않아서 “이거 어떻게 하면 좋아요, 스즈키씨…” 하고 곤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미야자키 감독이 생생히 기억난다.
- 한 논설가는 현대인이 자연과 환경에 대해 고민하거나, 사회 규칙을 의심하거나, 인간관계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비평했다. AI나 온라인 검색만으로 자기 판단을 충분히 했다고 믿는 경향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들은 보편적으로 이런 문제를 짚어왔고, 또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이끌어왔다. 스스로 사유하길 피곤해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지브리는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인터넷과 AI의 등장으로 우리의 삶은 훨씬 편리해졌다. 전세계 사람들과 소통이 쉬워졌고. 몇년 전만 해도 세상의 모든 정보를 몇초 안에 얻을 수 있으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정답만 알고 싶어 하는 풍조는 다양성을 부정하고, 스스로 생각하려는 태도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미야자키 감독이 늘 말하듯 현실 세계에는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지 않고, 개인의 눈과 귀만으로는 모든 진실을 알기 어렵다. 지브리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내가 확답할 수 없다. 그럼에도 관객이 스스로 고민하고, 성찰하고, 판단할 딱 한끗만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기쁠 것 같다.
- 현재 준비 중인 차기작이 궁금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후 관객은 어떤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
그건 기업 비밀인데. (웃음) 다양한 기획들이 오가고 있다. 지금은 단편애니메이션을 제작 중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말할 수 없다.
- 마지막으로 <아니메쥬와 지브리展>과 재개봉 3부작은 공통적으로 과거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무엇을 경험하길 바라나.
최근 영화감독 이와이 슌지와 <아니메쥬와 지브리展>을 관람했다. 그분이 쏟아내는 애니메이션 지식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알고 보니 그는 중학생 시절부터 <아니메주>를 정독해온 열혈 팬이라고 하더라. 잡지를 보며 제작 스태프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자연스레 영상 제작의 길을 꿈꿨다고 한다. <아니메주>는 애니메이션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작품을 만든 창작자를 조명한 최초의 잡지다. 작품 뒤에 얼마나 많은 스태프의 열정과 고생, 눈물과 고민이 있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이번 전시 또한 어린 세대들이 제작의 뒤편을 들여다보고 애니메이션의 품에 들어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의 추억은 방울방울
영화제작이 얼마나 힘든지 정말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 무아지경으로 몰입해서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오전 9시에 작업을 시작해서 점심으로 도시락 절반을 5분 만에 먹고, 나머지 절반은 저녁 식사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새벽 4시까지 일했다. 주말도, 휴일도. 그런 미야자키 옆에서 나도 계속해서 일했다. 이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담긴 기억의 전부다.
전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관객층 연령대가 생각보다 높았다. 성인 팬층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관객 연령을 낮추기 위해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주인공 파즈가 초등학생 정도로 설정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주인공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캐릭터에 어두운 면이 없는 게 과연 괜찮은가, 우리는 이 지점에 대해서 정말 길게 논의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내가 정말 프로듀서다운 일을 하고 있구나’ 하고 처음 느꼈던 작품이기도 하다.
<모노노케 히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후 13년이 흐른 상태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나이를 먹었고 언제나 그의 이름에만 의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처음으로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 홍보했다. 혹여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은퇴하더라도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이름 아래 다음 세대들이 작품을 만들어갈 수 있길 바랐다.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시점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 선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