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학원물에 필요한 질문들
물론 오늘날 학원물이 그리는 절박한 생존 이야기를 아예 근거 없는 과장이나 환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극 중 학생들이 겪는 과열된 입시경쟁, 불평등한 출발선에서 비롯한 심리적 박탈감, 관계 맺기의 어려움은 지금 시대의 10대들이 처한 현실과 분명히 맞닿아 있다. 실제로 청소년 정신 건강은 위험 신호를 보이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표한 ‘아동·청소년 우울 및 불안장애 현황’(2024년 4월)에 따르면 2023년 우울증으로 진료받은 아동·청소년은 5년 전인 2018년 대비 75.8% 증가했고, 불안장애의 경우 93.1% 늘었다. 최신 청소년 자살 통계도 비관적이다. 교육부와 전국 시도교육청이 집계한 2023년 초중고 학생 자살자 수는 214명으로, 종전 최고치였던 2009년의202명을 넘어 역대 가장 많은 수치를 기록했다. 자살의 주요 요인으로는 정신건강 문제, 가정 문제, 대인관계, 학업·진로 문제 순으로 복합적이었다. 문제는 지금의 학원물이 10대들을 둘러싼 사회적 압박과 정신적 고립이 징후적으로 포착하고 있을 뿐, 실제 청소년들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섬세하게 다루진 못하고 있다는 거다. 환상이 크고 자극적일수록 관심이 모일 수는 있지만 실제 현실 속 크고 작은 문제들은 도리어 비현실적인 것, 혹은 별 것 아닌 것 취급을 받으며 잊혀질 우려가 있다. 때문에 패턴이 읽히는 학원물이 연달아 나오는 지금이야말로 중간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5년 한국 학원물은 시청자의 몰입을 유도하기 위한 동력으로 폭력과 자극을 필수적으로 활용 중이다. 캐릭터는 결벽적인 상위 1%, 불우한 전학생, 무능한 어른 등 단선적으로 재생산하는 데 그치고, 서사구조 역시 조폭영화의 세계관이나 신분제 사회 축소판을 반복하고 평범한 학교생활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결과 학원물의 서사적 다양성을 저해하고 시청자의 상상력은 제한된다. 결국 이렇게 비슷한 내용의 재생산과 반복은 현실과의 괴리를 벌리는 지렛대로 작동할 공산이 크다. 청소년 대부분은 드라마처럼 극단적인 환경에 놓여 있지 않다. 사회 뉴스에서 다뤄지는 학교 배경의 폭력 사건을 드라마의 주내용으로 다룬다면 도파민 자극 외에 시청자에게 어떠한 공감도 주지 못한다. 오히려 미디어가 계속해서 자극적인 세계만을 재현한다면 청소년 시청자에게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평범한 학교생활은 재미없고 무의미한 걸까?’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리적 힘이나 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서사가 주는 영향, 우정이나 감정적 관계보다는 계급과 자본이 우선시되는 세계관, 구체적이고 때로는 아름답기까지 한 폭력 장면들이 실제 폭력의 정당화로 이어질 위험 역시 제작진은 고려해야 한다. 지금처럼 뉴스와 SNS에서 화제가 되는 학교 문제를 고민 없이 가져와 에피소드화하는 경우가 늘어난다면 학교에 한 인식을 더욱 왜곡할 수 있다. 실제로 대만 온라인 커뮤니티에 <선의의 경쟁>을 본 대만 시청자가 “한국 고등학교는 정말 돈 없이는 성공하기 어려운 시스템인가?” “가난한 학생은 재능만으로 좋은 대학에 가기 힘든가?”라는 질문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사례가 있다(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해외시장동향). K학원물이 글로벌 플랫폼으로 유통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인식이 더는 국내에서만 퍼지지 않기에 더욱 신중한 접근이 요구되는 이유다.
교실이 기다리는 다음 이야기
경쟁적이고 양극화된 사회와 고립된 개인 그리고 도파민을 충족하는 이야기. 시대적 분위기와 영상업계의 요구에 맞물려 지금의 학원물 시리즈는 동화적 성장기에서 디스토피아적 생존기가 되었다.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고 하더라도 학교를 다루면서 학교를 지워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예전 학원물이 더 낫다는 식의 회귀적인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과거 TV 학원물은 “새로운 내용이나 형식 시도에 소극적이며 교육적 의미나 효과에 치중”하는 한계가 있었다(문선영, ‘웹으로의 이동과 확장, 최근 학원물 드라마의 경향’, <한국극예술연구> 제62집, 2018). 그럼에도 옛 학원물이 섬세히 그리던 교실에서의 보통의 하루를 되새길 필요는 있다. 결국 다양한 학교의 모습과 청소년의 경험이 골고루 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단막극으로 등단한 신인 드라마작가 C씨의 바람이 곧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더 스릴 있는 교실을 그려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만 사실 내가 쓰고 싶은 건 내 학창 시절을 녹여낸 소소한 이야기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랑 지어냈던 황당무계한 스토리, 짝사랑하던 도서부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교내 도서관에 들락날락했던 일 같은 것 말이다.” 폭력 없이도 용기를 낼 수 있고, 극단적 경쟁 없이도 성장할 수 있는 이야기. 그것만이 주는 드라마틱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