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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한국 학원물 시리즈가 그리는 혹독한 학교
이유채 2025-05-22

최신 학원물 시리즈가 그리는 혹독한 학교

<선의의 경쟁>

상업영화 시장에서 중급 코미디와 정통 멜로드라마가 귀해진 지 오래다. 그 자리를 차지한 건 더 강렬하고 극적인 장르물이다. 살아남기 위한 싸움, 자극적인 서사가 장르물의 중심이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무대가 학교라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지난 2년간 화제를 모은 학원물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생존, 폭력 그리고 계급이다. 생존과 폭력이 서사를 이끄는 중심축이 되고 포식자와 피식자로 나뉘는 학생 캐릭터의 유형화는 어느새 한국 학원물의 공식이 됐다. 달리 표현하자면 한국의 학교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실과는 거리가 먼, 비현실적인 일들이 화면 속에선 당연한 것처럼 취급된다.

<피라미드 게임>(2024)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계급구조를 노골적으로 그린다. 대기업이 세운 백연여고에서는 ‘피라미드 게임’을 통해 A등급부터 F등급까지 학생 서열을 매기고 꼴찌는 반 내 합법적인 왕따가 된다. 왕따는 어떤 괴롭힘을 당해도 순응하는 게 이 게임의 룰이다. 전학 오자마자 F등급을 받은 주인공 성수지(김지연)는 밑에서부터 이 기괴한 시스템 자체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는 이사장 딸이자 절대 권력자인 백하린(장다아)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선의의 경쟁>(2025) 속 학교도 승패가 갈리는 냉혹한 경기장이다. 서울 명문 채화여고는 부모의 경제력과 성적이 ‘대한민국 상위 1%’인 학생들만 다닐 수 있다. 돌연변이처럼 모종의 이유로 이곳에 온 지방 보육원 출신 우슬기(정수빈)는 교내 독보적 존재인 유제이(혜리)와 관계를 맺는다. 전학 전 우슬기는 돈과 약물을 구하기 위해 불법적인 의료쇼핑 아르바이트를 하고 또래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는데 이 과정은 상세히 묘사된다.

<하이라키>

<하이라키>(2024)의 주신고등학교는 이보다 더해 ‘상위 0.01%의 소수’만을 허락한다. ‘하이클래스’ 학생들은 미국 하이틴 드라마 주인공처럼 슈퍼카를 몰고 다니며 사교 파티를 연다. 이들은 사회배려자 전형으로 입학한 장학생과 자신들을 넥타이 색깔로 구분한다. 서열 1위인 리안(김재원)을 주축으로 한 이들에겐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없어 이들은 따돌림과 마약, 불법 촬영과 유포 등 범죄를 서슴없이 저지른다. <스터디그룹>(2025)의 교실에는 앞선 학교들처럼 상류층의 상징과도 같은 샹들리에가 없지만 변함없이 약육강식의 법칙이 존재한다. 유성공고는 불량학생 집합소로 전국구로 유명하다. 조폭 연백파 수장의 아들 한울(차우민)이 실세로, 싸움 서열을 가리는 앱을 깐 전교생은 폭력적인 순위 쟁탈전을 일삼는다. <약한영웅 Class 2>(2025)에서 주인공 연시은(박지훈)이 강제 전학 간 은장고도 유성공고 못지않게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은장고가 일진 연합과 벌이는 거대한 패싸움이 이 시리즈의 후반부 하이라이트를 책임진다. 이렇듯 최근의 학원물 시리즈는 설정 단계에서부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까지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왜 자극을 택했는가

<학교2013>

“지금 자본은 순한 걸 용납하지 않는다.” 학원물 시리즈가 극단적으로 장르화된 산업적 배경에 대해 이러한 시리즈를 만든 적 있는 기획 프로듀서 A씨는 단호하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일상적인 학교 이야기는 이미 다 아는 것이라며 외면받을 수 있다. 시청자를 끝까지 붙잡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잦은 충격과 빠른 전개가 필요하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도중 하차’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시작부터 확실한 몰입도를 보여주는 대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때 스타 신인의 등용문이자 마니아층을 형성했던 KBS <학교> 시리즈나 <성장드라마 반올림#> 같은 TV학원물 드라마가 부활하기 어려운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다. 학원물 시리즈의 조연출로 일한 경력이 있는 드라마 PD B씨는 “이런 드라마에 대한 향수를 가진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라고 말하면서도 “제작비와 달라진 시청 환경, 시청층을 고려했을 때 지금 그런 작품을 기획하는 건 모험처럼 느껴진다”라고 현실적인 한계를 털어놨다.

자극 과잉의 시대, 수많은 플랫폼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학원물은 어느새 성장드라마에서 하이브리드 장르물로 진화했다. 학교는 더이상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관이 되었다. 학원 스릴러, 학원 범죄, 학원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 코드가 학교라는 공간과 결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웹툰 원작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은 이러한 흐름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 앞서 언급한 작품 중 <하이라키>를 제외한 <피라미드 게임> <약한영웅 Class 2> <스터디그룹> <선의의 경쟁> 모두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이들 시리즈는 원작의 강렬한 시각성과 선명한 캐릭터, 과감한 전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각색 되었다. 이는 “원작 팬덤을 안정적으로 끌어안기 위한 전략이자 원작의 팬인 창작자들의 애정이 맞물린 결과”(기획 프로듀서 A씨)로 볼 수 있다. 성매매에 노출된 10대의 이야기를 다룬 <인간수업>(2020), <오징어 게임>(2021), 좀비와 하이틴 장르를 결합한 <지금 우리 학교는> (2022)의 흥행 이후 한국의 다크 콘텐츠에 대한 글로벌의 관심이 높아진 점 역시 이 흐름을 가속화한 주요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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