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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미술의 경계가 와해될 때 - 푸투라 서울, 앤서니 매콜 개인전 ➀

푸투라 서울 전시 전경. Circulation Figures(1972_2011)

런던의 레이번스본대학교에서 사진과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한 앤서니 매콜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걸쳐 영화와 미술의 전통적인 경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고 서로 긴밀히 얽혀 있던 두 가지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1966년 설립된 런던영화인협동조합(London FIlmmakers’ Co-operative)은 피터 지달, 맬컴 르그라이스 등을 중심으로 주류 극영화의 환영주의적 재현을 벗어나 영화의 구성 요소와 제작 과정, 영화와 관객과의 관계를 내용으로 탐구하는 구조주의적, 유물론적 실험들을 전개했고 그 실험들은 영화 이야기의 허구적 시간에 선행하는 상영시간과 사건으로서의 영사 행위에 대한 관객의 참여적 지각을 촉진하는 갤러리 영사와 상영 퍼포먼스를 포함했다. 영화적 활동에 나서기 전부터 영국 전위영화 작가들과 교류했고 상영회에도 참석했던 매콜은 데이비드 커티스의 <실험영화> (Experimental Cinema, 1971)에서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1965)와 마이클 스노의 <파장>(1967)에 대한 서술을 읽고 영화에 대한 이들의 개념적인 접근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매콜은 2023년의 회상에 따르면 “한 가지 매체를 고집하는 작가를 찾는 게 드물었고 젊은 작가로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단어가 어떤 식으로든 ‘퍼포먼스’였던” 시기의 영향 또한 수용했다. 전통적인 평면적 회화와 고정된 객체로서의 조각을 벗어나 시간, 지속, 과정, 사건의 개념들을 활용하고 미술관의 규범적인 공간과 관람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는 다양한 실천들이 북미와 유럽에서 매체와 형태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었다. 매콜 또한 관객을 일정한 지침을 따르는 참여자로 설정하고 갤러리를 벗어난 장소에서의 행위들을 실천한 앨런 캐프로의 해프닝 개념, 그리고 관객을 음악을 실현하는 주체로 상정하고 시간과 공간을 음악적 수행의 일부로 포용한 존 케이지의 이론과 퍼포먼스에 자극받았다. 1960년대부터 뉴욕을 중심으로 신체의 급진적이고 즉흥적인 표현을 포함한 실험영화와 키네틱 퍼포먼스를 통해 이름을 알렸던 캐럴리 슈니먼과의 1971년 만남(런던에서 만난 이들은 1976년까지 동거했고 협업했다)은 해프닝과 퍼포먼스, 포스트-미니멀리즘 조각으로의 외연을 더욱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와 미술의 경계가 와해될 때

"Landscape for Fire"(1972)

실험영화와 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실험 모두의 영향을 받은 매콜은 1973년까지 여러 매체를 다루면서 예술작품의 고정된 형식에서 벗어나 시간, 관람성, 구조, 변주에 대한 초기의 탐구를 실행했다. 사진 연작을 통해 시간의 경과가 재현되고 경험되는 방식을, 기계적 운동을 개조한 슬라이드 영사를 통해 영사 장치의 수행적이고 감각적인 측면을 탐사한 매콜은 1972년 <불의 풍경>(Landscape for Fire)을 제작한다. 약 7분간의 이 영화는 매콜이 런던 외곽의 야외에서 진행한 세번의 퍼포먼스 중에서 두 번째 퍼포먼스를 기록하고 편집했다. 상황에 따라 15분에서 90분까지 진행된 각 퍼포먼스에서 흰옷을 입은 퍼포머들은 6x6의 격자 모양으로 배열되고 휘발유가 담긴 36개의 팬을 3개의 악장으로 구분된 악보에 따라 점화했고, 별도의 발생기로 격자 사이에 연기를 더했으며, 세개의 뱃고동 발생기가 1분간 간격으로 멀리서 울렸다(이 퍼포먼스의 기록사진 여러 장을 슈니먼이 촬영했다). 점화 순서와 시간의 경과에 따른 불꽃들의 순열 조합을 악보 형태로 설계한 매콜의 기획은 케이지의 영향을 받은 개념주의 미술의 계열주의(serialism)를 예시했고, 이는 1973~74년에 걸쳐 세번 진행되었고 마지막 버전은 12시간으로 구상된 <불의 주기>(Fire Cycles)에도 이어졌다. 하지만 <불의 풍경>의 실제 퍼포먼스는 즉흥적으로 이루어졌고, 1973년 인터뷰에 따르면 “연극, TV, 영화, 콘서트홀의 전통적인 표준에 비추어볼 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처럼 장소-특정적이고 일회적이며 과정적인 퍼포먼스에서 출발했지만, <불의 풍경>의 영화 버전은 필름과 비디오를 퍼포먼스의 기록을 위한 매체로 채택했던 당시 여러 개념주의 미술가의 영상 작품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매콜은 45분간 진행된 두 번째 퍼포먼스를 7분으로 응축하면서 프레임 일부를 거꾸로 뒤집거나 동일 퍼포머의 동선을 역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기록 영상을 편집했다. 이는 카메라 앞에 현전한 사건을 다시 조직하고 패턴을 부여하는 편집의 역량에 대한 당시 구조유물론 영화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이같은 관심은 서로 마주 보는 거울 한쌍이 설치되고 바닥에 신문지가 깔린 방으로 사진작가와 영화 제작자를 초대해 이들이 서로를 카메라로 기록하는 과정을 담은 <써큘레이션 피겨스>(Circulation Figure, 1972/2011년 설치작품 형태로 재구성)에서의 주기적인 프리즈프레임으로 이어졌다.

내향적 확장 영화의 역설: ‘솔리드 라이트 필름’

<원뿔을 그리는 선>

1973년부터 75년까지 매콜은 뉴욕과 런던을 왕복하며 ‘솔리드 라이트 필름’(solid light film)으로 알려진 일련의 작품을 제작한다. <원뿔을 그리는 선>(Line Describing a Cone, 1973)으로 대표되는 이 작품 대부분에서 관객이 표준적인 영화에서 기대하는 프레임 내의 2차원적인 구상적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검은 배경에 제도용 펜과 구아슈로 그린 단순한 선이 일정 시간을 두고 서서히 변화하고, 연기로 채워진 완전한 어둠의 방에서 영사기의 불빛이 원뿔 모양을 이루며 ‘수평으로’ 영사된다. 이 작품에 대한 매콜의 진술은 명료하고도 의미심장하게 구조-유물론 영화의 관심을 공유한다. “<원뿔을 그리는 선>은 영화의 환원 불가능한 필수 조건 중 하나인 영사된 빛을 다룬다…. 이 영화는 실제 3차원 공간에 존재하는 최초의 영화다. 이 영화는 영사되는 순간, 즉 현재에만 존재한다. 이 실시간(real time)을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환영을 포함하지 않는다. 공간은 지시적이지 않은 실제의 공간이며,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여기서 실시간은 제도적 영화에서의 서사적인 시간을 뒷받침하지만 제도적 영화에서는 단지 러닝타임으로만 인식되는 영사의 시간이며, 그 시간은 관객이 참여하는 영사기의 작동시간이라는 점에서 과거가 없는 현재, 과정으로서의 현재다.

여기까지만 말한다면 솔리드 라이트 필름은 영사기와 그 광선뿐 아니라 영사가 일어나는 실시간과 실제 공간을 관객의 구체적인 경험과 결부된 구성 요소로 취급했던 런던영화인협동조합 작가들(특히 맬컴 르그라이스)의 상영 퍼포먼스와 유사할 것이다. 실제로 1974년 뉴욕과 런던의 갤러리 및 대안적 상영 공간에서 <원뿔을 그리는 선>은 오늘날의 설치작품 포맷이 아니라 집단적 관객을 대상으로 한 ‘상영’의 형태로 구현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여러 공간에서 상영하면서 매콜은 자신의 솔리드 라이트 필름이 현대 조각의 관심, 그중에서도 조각의 물질적 고정성을 해체하고 시간과 공간, 관객의 참여를 조각의 구성 요소로 포용한 포스트-미니멀리즘의 관심과 공명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상영으로 실현되었더라도 솔리드 라이트 필름에서 영화 이미지를 가능하게 하는 본질적 구성 요소인 영사되는 빛에 대한 탐구는 제도적 영화가 상정하는 부동의 관람성을 벗어나도록 인도한다. 즉 영사기는 프로젝션 부스를 벗어나 3차원의 대상으로 자리하고, ‘원뿔을 그리는’ 빛은 관객이 여러 장소를 점유하며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실체가 된다. 따라서 빛의 부피감과 규모, 관객의 신체는 조각의 요소를 활성화하는 반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선과 비물질적인 빛의 존재는 영화의 본성에 대한 관객의 주목을 유도한다. 그래서 매콜은 <원뿔을 그리는 선>을 비롯한 솔리드 라이트 필름이 “조각과 영화 모두와 동등한 관계를 맺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여러 예술적 형태를 동시에 소환하는 솔리드 라이트 필름의 풍부함은 애니메이션과 드로잉의 공존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매콜은 21세기까지도 이어져온 ‘솔리드 라이드’ 작품을 구상할 때 항상 드로잉을 그려왔는데, 이는 과정과 순열조합, 음악적 계열에 대한 개념미술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16mm 필름을 포함한 애니메이션 작업대에서 작업했고, 서서히 변화하는 선을 운동의 환영을 낳는 과정에 대한 탐구로 여긴 그의 관념은 필름 기반 애니메이션의 대안적인 사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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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푸투라 서울(FUTURA 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