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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캐리어를 끄는 소녀> 윤심경 감독
이유채 사진 오계옥 2025-05-16

15살 영선(최명빈)의 캐리어엔 여행의 설렘이 담기지 않았다. 양부모에게 버려진 뒤 갈 곳을 잃자 또래 수아(문승아)의 테니스 훈련 파트너로 그의 집에 잠시 머문다. 그러나 영선은 이곳에서의 체류 기간을 영원으로 늘리고 싶다. 선수 출신인 수아 아빠(김태훈)에게 좋아하는 테니스를 배우고 생전 받아본 적 없는 따스한 걱정을 수아 엄마(유다인)에게 받으며 수아와 자매같이 살 수만 있다면 못할 게 없다. 제목의 힘일까. 윤심경 감독은 “<캐리어를 끄는 소녀>가 이끄는 대로 여기까지 왔다”라고 말했다. “노력해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30대”를 지나 40대에 쓴 시나리오로 첫 장편을 완성했고 영화가 전주영화제 한국경쟁에 오르면서 본가 전주를 기쁜 마음으로 찾았다. 인터뷰 장소인 북카페 북눅 전주에 여유롭게 도착한 윤심경 감독과 마주 앉았다. 각자의 책에 몰두한 방문객들 사이에서, 우리도 이야기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 ‘캐리어를 끄는 소녀’라는 이미지가 선명해 여기서부터 시작한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했다.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동네 어느 딸 있는 집에 한 여자아이가 잠깐 살다가 나간 일이 있었다. 그 애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 어디로 돌아갔는지까지는 듣질 못해서 이 일이 내 삶에 미스터리한 한 조각으로 남아 있었다. 이 일화가 다시 떠오른 게 2020년쯤이었다. 선택받기를 마냥 기다려야 하는 나 자신이 무능력하게 느껴질 때였다. 나와 달리 제 욕망을 뚫고 나가는 인물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다 보니 십수년 전 그 아이는 참 도발적이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캐릭터가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두 가지 버전을 만들었다. 처음이 단편 <우리 집에 온 아이>였고 다음이 첫 장편 <캐리어를 끄는 소녀> 였다.

- 수아네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영선은 마치 네트를 넘지 못하는 테니스공 같다. 네 인물 사이에서 감정이 공처럼 오가며 긴장이 고조되기도 한다. 가족관계와 테니스를 엮는 발상은 어떻게 시작 했나.

영화가 정적인 편이라 동적인 요소가 들어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포츠를 생각하고 처음 떠올린 게 발레였는데 영선과 수아네 가족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쓰기에 발레는 혼자서 하는 운동이었다. 그래서 찾은 게 테니스였다. 상대가 필요한 스포츠라는 점에서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고 테니스 경기의 호흡과 리듬이 영선 캐릭터의 질감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탁탁탁탁’ 하는 움직이는 공 소리를 영선이 세상을 향해 말하는 방식과 연결지어 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본격 스포츠영화는 아니지만 훈련 장면이 꽤 여러 차례에 걸쳐 중요하게 담겼다. 촬영과 편집, 연기 디렉션까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땠나.

그래서 김지룡 촬영감독과 준비를 정말 많이 했다. 촬영감독이 테스트 촬영을 한번 하고서는 운동과 감정을 같이 가는 건 어렵겠다고 판단을 해줬다. 그래서 중간에 얼굴 클로즈업하는 경우 없이 경기 상황에만 집중했다. 원창재 편집감독의 공도 컸다. 일전에 탁구가 나오는 <창밖은 겨울>을 작업한 분이라 구기종목 장면의 리듬감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실제 경기처럼 보이도록 CG 단계에서 세세하게 살폈다. 실제로 3~4개월간 테니스를 배운 최명빈, 문승아 배우가 더운 야외에서 놀라울 정도로 잘해주었고 조명 퍼스트 스태프가 테니스 경력자인 운도 따라주었다. 아, 나도 촬영 전에 테니스를 배웠는데 너무 못 쳐서 3개월 하고 그만뒀다. (웃음)

- 영선과 수아뿐만 아니라 영선과 수아 엄마, 수아와 수아 아빠 등 가능한 일대일 관계를 모두 살려 서사적 밀도가 높다. 이 역시 여간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었을 텐데 창작의 고통에 관해 들려준다면.

캐릭터를 잡을 때 기본이 되는 영선이 직선적이고 잡아주는 역할이라면 수아는 극에 리듬감을 주는 역할이길 바랐다. 특히 영선은 ‘버려진 아이’의 신파로 빠지지 않도록 최대한 건조하게 그리려 했다. 그래서 플래시백도 거의 안 썼다. 이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선은 가장 먼저 제일 가까운 수아한테 다가갔을 거고 수아 엄마, 수아 아빠에게 예쁨 받을 궁리를 했을 거다. 그렇게 영선이 했을 법한 행동들을 중심으로 상상하다 보니 나머지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또렷해졌다. 일대일 관계는 영선으로 생기는 수아네 가족의 ‘균열’을 다각도로 보여주고 싶은 과정에서 살지 않았나 싶다. 여기서 균열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 과정에서 나름의 상처를 입은 수아는 ‘터뜨림의 성장’을 겪고 그 파동은 다시 영선에게까지 미친다.

- 가장 호기심이 드는 캐릭터는 수아 엄마였다. 목소리를 내기도, 행동하기도 주저하는데 그는 대체 무엇을 불안해하는 걸까.

극 중 모든 캐릭터가 자기소멸, 그러니까 스스로 존재가치를 증명하지 못할까봐 걱정한다. 지영(수아 엄마)의 경우 부녀가 있는 테니스의 세계 바깥에 있는 인물이다 보니 이 집에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더 심하게 받을 거고. 시나리오상에서 지영은 더 답답한 인물이었다. 쿨한 텐션을 가진 유다인 배우가 지영을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어줬다.

- 공을 받아칠 자세를 취하는 영선의 마지막 모습은 영선이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라는 희망을 품게 하는 엔딩이다. 구상 단계에서부터 이 신으로 영화를 마무리하고 싶었는지 궁금하다.

‘영선이 마지막에 다시 코트장으로 돌아와 테니스를 친다’는 건 처음부터 변하지 않았다. 보통 작업할 때 엔딩이 잘 바뀌기도 하는데 이번만큼은 신기하게도 예외적이었다. 이 이야기는 희망적으로 끝나는 게 맞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꽃은 누구에게라도 핀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러니 영선도 언젠가 화사하게 피어나는 시기를 맞이하지 않을까? 그런 응원의 마음을 관객도 품어주길 바랐다.

- 이제 다음 스텝은.

미스터리가 결부된 로맨틱코미디를 하나 쓰고 있다. 첫 장편은 조용했지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와 같은 1990년대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를 좋아한다. 언젠가 컬러든 사운드든 한 요소를 과감하게 써서 밝은 분위기를 최대한 살린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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