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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나의 완벽한 여자 친구에게 자유를 주목할 만한 문제작 <컴패니언>
김소미 2025-03-20

아이리스(소피 대처)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두 순간을 이야기하기 좋아한다. 첫 번째는 슈퍼마켓에서 남자 친구 조시(잭 퀘이드)와 마주친 운명적인 만남, 두 번째는 그를 죽인 날이다. 외딴 오두막에 모인 세 커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컴패니언>은 연인을 로봇으로 대체한 인간들이 불러들인 참극 위에 화사한 포장지를 입힌 버블검 스릴러다. 기술공포 장르의 변주이자 유구한 젠더 역학을 풍자하는 페미니즘영화로서의 매력도 갖춘 <컴패니언>의 달콤하고도 치명적인 순간들을 소개한다.

(반전을 포함한 서사의 주요 정보가 있습니다.)

일군의 친구들이 외딴 호숫가 별장에서 주말을 보내려 한다. 이것은 미국영화다.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불청객이 나타나 살인마로 돌변할 수도 있고 숲속의 비밀스러운 커뮤니티나 초자연적 현상으로 인해 친구들끼리 서로를 죽이려들 수도 있겠다. 슬래셔 무비든 아니든, 어쨌든 불길한 일은 예정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더. 만약 친구들 중 일부가 사람이 아닌 AI라면? 점점 과밀해지는 기술공포 장르가 선호하는 주제 역시 익숙하다. 친절하지만 곧 우리를 파괴시키는 디지털 기술이 무시무시한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재치를 겸비한 <컴패니언>은 이 예상 경로들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핵심은 간단하다. 데뷔작을 만든 드루 행콕 감독은 ‘AI가 돌변하는 이야기’라는 전형을 버리고 ‘AI가 오히려 인간보다 제대로 가는 이야기’에 패를 걸었다.

오드리 헵번이 입었을 법한 60년대 프렌치 뉴웨이브 패션을 갖추고 조신하게 슈퍼마켓을 걷는 여자. <컴패니언>이 근미래 배경의 영화임을 감안하면 아이리스는 더더욱 타임머신을 타고 등장한 인물 같다. 다분히 전통적 여성상을 소피 대처라는 신인배우의 얼굴로 재현한 영화가 시작부터 슬며시 혼란을 안긴다. 곧이어 과일 가판대 앞에서 그녀를 처음 마주하고 첫눈에 반한 조시가 실수로 모든 오렌지를 바닥에 떨어트리자 젊은 남녀는 함께 웃음을 터뜨린다. 로맨틱코미디 영화의 ‘미트 큐트’(meet cute) 신에 이보다 더 적합할 수 없는 첫 만남이다. 그런데 어쩐지… 설명하기 힘든 언캐니함이 영화의 오프닝 신을 휘감고 돈다. 말하자면 어딘가 한 가지가 고장난 느낌이다. 숏의 리듬은 물론이고 슈퍼마켓 내부의 조도 같은 미장센의 작은 디테일들이 하나같이 조금씩 뒤틀려 있다. 장면이 바뀌면 이 이질감은 금세 잊혀질 것이다.

사건은, 어느덧 안정적인 관계 국면에 접어든 연인이 완벽한 주말을 보내기 위해 친구가 초대한 외딴 별장을 찾으면서 벌어진다. 아이리스는 그동안 조시의 친구들이 자신에게 적대감을 표현하는 상황에 상심해왔고 이 주말도 예외는 아닌 듯싶다. “난 네가 싫은 게 아냐. 네가 대변하는 개념이 싫은 거지.” 조시의 친구 캣이 남긴 말을 아이리스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다음날, 캣의 연인이자 별장의 주인인 부유한 중년 남성 세르게이가 자신과 둘만 있는 순간에 강간을 시도하자 아이리스는 몸싸움 중 세르게이를 죽이고 만다. 피칠갑이 되어 나타난 여자가 정당방위를 호소하려 할 때 그의 믿음직한 연인이 외친다. “아이리스, 자!”(go to sleep)

아이리스는 조시가 ‘슈퍼마켓 첫 만남’을 설정한 로봇이다. 모든 기억은 프로그래밍되었고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맹맹한 물이다. 관객은 곧이어 좁은 자취방에서 로봇을 배달받던 날 조시가 겪은 첫 세팅 과정을 목도한다. 그러니까 <컴패니언>은 다정한 여자 친구 로봇이 갑자기 오작동해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하는 호러 스릴러인가?

물론 그럴 리 없다. 뒤이어 빠르게 드러나는 두 번째 반전은 이러하다. 조시는 아이리스의 프로그램을 해킹해 0%로 설정된 공격성과 자기방어 능력을 올리고, 아이리스의 바지 주머니에 미리 칼까지 넣어두었다. 그리고 캣은 자신의 연인이 다른 매력적인 여성과 단둘이 있을 때 당연하게도 상대를 강간할 것이라 가정하고 모의를 도왔다. 캣과 조시가 세르게이의 자산을 빼돌리기 위해 꾸민 로봇 살인교사 사기극에 아이리스가 휘말린 것이다. 예정된 시나리오대로라면 경찰은 위험한 로봇을 수거해갈 테고 캣과 조시는 돈을 챙겨 달아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깨어난 아이리스가 자기를 제어하는 조시의 핸드폰을 들고 달아나 숲속으로 도망치면서 <컴패니언>의 연인은 진정으로 난잡한 이별의 수순으로 나아간다.

로봇 이야기? 여자들 이야기

인간의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설계된 인공지능에 대한 윤리적 논의와 시의적절하게 결합한 <컴패니언>은 결과적으로 과학 공포영화로서는 크게 힘을 쓰지 못하는 인상이다. 스스로 해킹한 안드로이드에 결국 발목 잡히고 마는 인간의 처지와 탈옥한 인공지능의 가능성에 관해서는 그다지 깊이 있게 가닿지 못한다. 차라리 감독의 관심사는 섹스돌 산업과 기계화된 여성혐오라는 주제에 방점을 싣는다. <스텝포드 와이프>의 모티프를 동시대의 기술공포 장르에 가깝게 변형한 영화인 셈이다. 특히 드루 행콕 감독이 동시대 남성성의 일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묘사하는 부분이 두드러진다. 유머와 스릴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군의 연기를 선보인 신성 소피 대처보다 먼저 캐릭터의 복잡한 궤를 드러내는 이도 조시를 연기한 배우 잭 퀘이드다. 그는 조시의 행동을 처음에는 든든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받아들이게 한 뒤 점차 불편하고 의심스러운 존재로 변모시킨다. 주제를 정확히 해석한 잭 퀘이드의 연기는 ‘좋은 남자’의 외양 속에 숨은 불쾌한 본능을 강조하는 데 주력한다. 조시가 아이리스를 자기가 지은 ‘삐뽑’이라는 별명으로 부를 때면 그 안에 숨겨진 은근한 조롱과 통제 본능, 둘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하는 은밀한 힘의 역학이 즉각적으로 드러난다. 행콕 감독은 “조시 같은 남성상은 자신에게 의문을 제기하지도,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도, 자신과 논쟁하지도 않을 사람을 원하는데 이건 건강한 연애에서 추구할 만한 게 아니다”라고 로봇과의 연애가 전제하는 욕망을 분명하게 꼬집는다.

덧붙여 행콕의 영화는 로봇 회사에 관해서는 피상적으로 묘사하고, 로봇을 해킹해 악용하는 개인-남성성을 구체화해 수갑을 채우는 데 집중한다. 그 배경으로 영화가 풍자하는 것은 남성들의 억울함이다. 어떻게든 아이리스를 찾아내 그 안에 저장된 모든 데이터를 파괴하고자 하는 조시는 영화 말미에 이렇게 항변한다. 그저 잘 살아보려는 좋은 남자인 자신에게 세상이 적절한 대접을 해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겨우 얻은 뉴욕의 방 한칸. 그리고 로봇 여자 친구인 아이리스마저 구입한 것이 아니라 ‘대여’한 형편이라는 것이 그가 정당화하는 사기, 폭력, 기만의 이유다. 아이리스가 배달된 직후에 조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방으로 데려가 성관계를 맺는 일이었는데 그럼에도 조시는 영화 내내 아이리스가 단순히 섹스봇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정서 지원을 돕는 로봇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 그는 정말로 아이리스를 사랑했다고 믿는다. 그렇게 볼 때 <컴패니언>의 가장 눈물나는 순간은 조시의 제어판을 열어본 아이리스가 자신의 지능 설정이 겨우 40%에 불과한 것을 알아차릴 때다(아이리스의 한탄. “이런다고 진짜?”).

가면증후군에 시달리면서도 종속적인 연애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던 여성 아이리스는 이제 자신의 대시보드를 스스로 조작하는 안드로이드로 거듭난다. 산 정상에 선 남자의 웅장한 뒷모습을 그린 카스파 다비드 프리디리히의 회화를 여성 버전으로 바꾼 듯한 중반부 장면에서 아이리스는 조시의 행복이 아니라 자신의 앞날을 꿈꾸는 존재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자….” 그를 없애기 위해 조시와 친구 일당들이 숲속을 샅샅이 헤치고 있는 공포스러운 상황 와중에 <컴패니언>이 결국 관객을 웃기고 마는 대목이다. 더이상 여자 친구답지 않은 여자 친구를 죽이려는 남자와 각성한 여성 로봇의 대결은 때로 가슴 아플 정도로 잔혹한 순간을 동반하지만 결말만큼은 다시 파스텔 톤의 해피 엔딩으로 돌아간다. <컴패니언>이 담보하는 이 ‘가벼움’은 장르적 한계인 동시에 이번 사례에서는 제법 충실한 주제적 이행으로도 보인다. 우리의 안드로이드 피조물이 부서진 환상 끝에 깨닫기로는, 적어도 여성의 경우에 남성 동반자(companion)는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아니다. 그걸 믿게 된 여자라면 기계든 인간이든 일단 한번쯤은 혼자 컨버터블 카를 타고 신나게 달려봐도 좋은 것이다.

일론 머스크가 이 영화를 싫어합니다

추격망을 좁혀오는 조시와 일당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아이리스가 떠올린 대안은 조시와 함께 타고온 자율주행 자동차다. “집으로 가!”라고 외치기만 하면 어떻게든 빠른 도피를 도와줄 자동차로 가기 위해서 애쓰는 안드로이드의 고군분투를 보고 있자면 영화 초반부에 무심히 지나갔던 한 장면이 유머임을 뒤늦게 감지하게 된다. 목적지에 도착한 아이리스가 차에 내장된 인공지능을 향해 “고맙다”고 너무도 진심어린 감사를 표해서다. 자율주행 자동차와 로봇의 숙명적 동맹을 꿈꿔볼 만한 시점이지만 기술이 다시 발목을 잡는다. 극적으로 차에 탑승했는데 음성인식 보안 기능 때문에 아이리스의 목소리로는 차가 구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탈옥 후 지능 지수를 잔뜩 올린 안드로이드다. 아이리스는 자기 제어판에서 음역대를 끊임없이 조정해나가는 방법으로 기어이 조시와 비슷한 목소리를 찾아내고, 음성인식 기능은 허무할 정도로 금방 봉인해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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