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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모든 것이 바뀌었다!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 현장 취재

눈발이 흩날리는 2월13일 목요일 저녁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75번째 베를린국제영화제(이하 베를린영화제)가 막을 열었다. 유럽에선 특별하게 여기는 75회 생일 파티인 데다 신임 집행위원장 트리샤 터틀이 처음 차린 생일상이라 설렘과 기대가 가득했다. 한데 개막식 몇 시간 전, 뮌헨에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이주민이 시위대를 트럭으로 들이받아 20여명이 다쳤다는 것. 게다가 독일은 23일 조기총선으로 선거유세가 한창이고, 뮌헨에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논의하는 안보회의가 열리는 중이었다. 2024년 시상식에서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가자전쟁 휴전을 요청한 팔레스타인 영화 <No Other Land> 제작진을 향한 박수 갈채를 마주했던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올해 유대인 희생자를 기리는 다큐멘터리를 전면에 내세워 영화제 측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개막식에서 명예황금곰상을 수상한 배우 틸다 스윈턴은 BDS 운동(2005년 팔레스타인 시민사회 단체들이 국제법과 인권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시작한 비폭력 운동)에 지지를 표했고, 파노라마 퀴어 부문 시사회에선 홍콩 출신의 준리 감독이 독일에서 금지된 팔레스타인 해방 구호를 외쳤다. 정치적 논쟁 속에서 영화를 향한 관객의 발걸음들은 분주했다. (이 기사는 2025.03.07에 수정되었습니다.)

개막작 <더 라이트> 리뷰

개막식. 신임 집행위원장 트리샤 터틀과 심사위원장 토드 헤인스, 심사위원단.

이번 영화제엔 가족에 관한 영화가 많이 보인다. 그중 하나가 톰 튀크버 감독의 개막작 <더 라이트>다. 감독의 빠르고 재기발랄한 감각이 초반 시퀀스의 속도감으로 전달된다. 가족문제뿐만 아니라 세대간 갈등, 번아웃, 환경운동, 병적 심리 현상, 세태 풍자, 임신중절, 이주민 문제 등 여러 주제를 통해 현 독일의 문제를 거의 모두 다룬다. 그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가 교차한다. 사회극, 뮤지컬, 애니메이션, 공포, 코미디, 미스터리가 혼재한다. 가족구성원과 집 청소부로 고용한 미스터리한 시리아 난민 여성까지 수많은 등장인물의 스토리가 뒤섞여 엮인다. 베를린에 거주하며 17살 쌍둥이 남매를 둔 40대 중반의 중산층 부부는 중년의 위기뿐 아니라 부부 위기를 겪고 있다. 아들은 3D 가상세계 비디오게임에 빠져 있고, 딸은 환경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나이트클럽에서 마약까지 손대고 있다. 그런데 이 집에 시리아 출신 가정부가 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톰 튀크버가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퀸의 <Bohemian Rhapsody>다. 튀크버는 “노래 하나에 프레디 머큐리가 원하는 주제와 스타일이 섞여 있고 그럼에도 곡 하나로 전체를 이룬다. 영화로 이런 방식을 구현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곡의 저작권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에게 직접 손편지를 써보내 영화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을 겨우 허락받았다. 톰 튀크버는 “<Bohemian Rhapsody>는 이 영화의 청사진”이라고 했다. 영화에 대한 평은 엇갈린다. 일간 <타츠>는 “튀크버는 격정과 키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그런 면에서 이번엔 용기 있게 한발 나아갔다”고 했고 일간 <타게스슈피겔>은 “영화는 실제 삶보다 더 진부하다”고 혹평했다.

가족관계를 다룬 영화들

개막작 <더 라이트>.

그 밖에도 경쟁부문에 가족관계를 다룬 영화는 차고 넘쳤다. <핫밀크>는 20대의 소피아와 60대 중반에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로즈가 스페인에서 치료받으며 겪는 내적갈등, 모험, 성장을 그렸다. <리빙 더 랜드>는 경제성장과 사회변화의 시작 단계인 1991년, 중국 농촌의 가난한 대가족의 사연을 그렸다. 10살 소년 추앙의 부모는 도시로 일하러 가고 추앙은 조부모와 삼촌, 숙모, 사촌과 대가족을 이루며 함께 일상을 보낸다. 카메라는 이들과 거리를 두며 공동체가 얼마나 단단한 끈으로 이어져 있는지 간접적으로 비춘다. 장례식 두번과 결혼식과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나누는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형식으로 찍었다. 부모를 그리워하는 추앙이 안쓰러운 어른들은 소년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푼다. <타츠>는 이 영화가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격변에 대해 절제된 방식으로 접근한다. 또 훠멍 감독은 주변부에서 포착한 이미지를 통해 역사의 전환점을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라고 썼다. <왓 마리엘 노스>도 주목할 만하다. 단순한 스토리라인이지만 우스꽝스러운 상황 연출로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10살 마리엘이 어느 날 부모의 생각과 경험을 읽는 초능력을 얻으면서 겪게 되는 상황을 가벼운 터치로 그려냈다. <타츠>는 “적재적소에 들어가는 대화와 편집만으로도 경쟁부문의 우아한 하이라이트였다”라고 호평했다.

현재 과거 그리고 진행형

경쟁부문 <핫밀크>

베를린영화제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희생자를 기억하는 다큐멘터리 <어 레터 투 데이비드>가 특히 주목받았다. 12년 전 <유스>라는 데뷔작으로 베를린영화제를 찾은 톰 쇼발 감독의 영화다. <유스>에 출연했던 쌍둥이 형제 중 다비드 쿠니오는 2023년 테러 조직인 하마스에 인질로 잡혀갔다.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지난 영화의 캐스팅 장면을 넣었다. 쌍둥이 형제는 공교롭게도 소녀를 납치하는 괴한들을 연기한다. 다비드가 겪고 있는 현실과 겹친다. 다비드의 쌍둥이 형제인 에탄과 다비드 가족들은 인터뷰를 통해 고통스러운 심경을 드러낸다. 베를리날레 개막날 이 영화를 전면에 내세우며 울리히 마테스, 안드레아 자바츠키 등 독일의 유명 배우들은 ‘다비드를 집으로’라는 구호가 적힌 다비드 쿠니오의 사진을 들고 퍼포먼스를 벌였다.

경쟁부문 <왓 마리엘 노스>.

스페셜 부문의 <마이 언디자이어러블 프렌즈>에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 푸틴 반대편에서 활동하는 독립언론 기자들의 삶과 인터뷰를 보여준다. 러닝타임이 무려 다섯 시간 반이나 된다. 한편 클로드 란츠만 감독이 제작한, 9시간이 넘는 유대인 학살 다큐멘터리영화 <쇼아>와 메이킹 오브 <쇼아>에 해당하는 <올 아이 해드 해즈 나싱니스>가 관객에게 처음 공개됐다. 기욤 리보 감독이 <쇼아>에서 사용되지 않은 자료들을 모아 편집해 세상에 내놓았다. 올해는 나치 강제수용소 해방 80주년이 되는 해다. 카메라는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함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증언자들의 감정을 포착한다.

예술가 전기영화들

베를리날레 스페셜 <올 아이 해드 해즈 나싱니스>.

한편 이번 영회제에는 예술가의 생애 한 부분을 기록 재생한 영화들이 많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파노라마 부문의 <피터 후자의 날>은 배우 벤 위쇼가 뉴욕의 유명 사진작가 피터 후자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1974년 어느 날 피터 후자의 친구 린다 로젠크란츠가 피터 후자를 인터뷰한 자료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그 전날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는 주문을 받은 후자는 맨해튼의 자신의 아파트에서 75분 러닝타임 내내 모놀로그 수준으로 전날 있었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은 차를 마시기도 하고, 힘들면 침대에 눕기도 하며 수전 손택 등을 만났던 경험을 세세한 부분까지 이야기로 풀어낸다. 연극무대에서 갈고닦은 그의 경력이 빛난다.

<파과> 프레스콜.

경쟁부문의 <블루문>은 기자시사회 때 가장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12년 전 <보이후드>로 최고감독상을 받은 후 첫 방문이라 관심이 더욱 쏠렸다. <블루문>에선 에단 호크가 20, 30년대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계를 주름잡던 작사가 로렌즈 하트로 나온다. 죽기 몇달 전, 뮤지컬 프리미어를 마치고 파티를 기다리는 순간과 파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영민하고 기지 넘치는 하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영화는 그날 그 자리의 생생한 느낌을 지금 여기로 관객 앞에 소환한다. 그의 활기에 찬 모습은 20살 대학생 엘리자베스와 사랑에 빠져서다. 영화 산업지 <데일리 스크린>은 <블루문>에 대해 “잃어버린 연극 세계에 대한 향수를 가득 품고 따뜻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고 평했다.

<미키 17> 초연 레드카펫.

스페셜 부문의 <컴플리트 언노운>은 밥 딜런의 전기영화다. 티모테 샬라메가 밥 딜런의 젊은 시절로 분해 2년간 트레이닝을 받은 뒤 직접 노래하고 연주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밥 딜런의 팬뿐 아니라 티모테 샬라메의 팬들이 몰렸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개봉했지만 트리샤 터틀은 티모테 샬라메를 영화제에 초대했다. 영화는 콘서트 실황 공연같이 음악에 집중하며 보여준다. 그 밖에도 파노라마 부문에 전위예술가인 몽크의 예술과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몽크 인 피스>, 1940년대 독일의 전설적 배우이자 가수인 힐데가르트 크네프의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영화 <아이 원트 잇 올>, 흑인 시인인 랭스턴을 그린 영화 <루킹 포 랭스턴> 등 예술가 관련 영화가 많이 보인다. 경쟁부문에 특이한 영화도 있었다. 비디오아트에 비견할 만한 파격적인 구성과 화면을 보여준 벨기에영화 <리플렉션 인 어 데드 다이아몬드>는 젊은 시절 첩보원을 한 것으로 보이는 한 노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듯 회상 신처럼 70년대 첩보영화 시퀀스가 이어지는 색다른 영화다.

영화제는 종종 세계 정세를 미세하게 감지하는 지진 측정기에 비유된다. 올해도 베를린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의 불똥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이번 베를린영화제는 예산이 축소되고 예년에 비해 상영관과 영화 수도 대폭 줄었다. 하지만 영화제에 대한 열기는 식지 않았다. 대중성 있는 영화, 아트하우스영화 할 것 없이 속속 매진이다. 영화제 중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뉴스가 들린다. 위기의 시대, 영화제에 예술가와 음악을 다룬 영화들이 많이 보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주는 것은 결국 예술인가.

틸다 스윈턴의 황금곰상 시상식

틸다 스윈턴

개막식 갈라에서 열린 황금곰상 시상식은 특별한 관심을 모았다. 틸다 스윈턴은 1986년에 데뷔 영화 <카라바지오>로 베를린영화제에 처음 초청받은 뒤로 지난 39년 간 총 26편의 영화로 베를린영화제에 참가했다. 스윈턴은 전날 개막식 수상 소감에서 모든 이와 화해하는 태도를 강조했다. 인간에게 중요한 주권, 역사, 문화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야 할 현재, 인간적 연대와 정의를 구현하자고 호소한 것. 처음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했던 1986년 당시 건재했던 장벽을 회고하며 영화가 머릿속 장벽을 허무는 데 일조해야 한다고 했다. 다음날 시상식 기자회견에서 스윈턴은 “나는 BDS(보이콧, 투자 철회, 제재)에 존경심을 갖고 그에 대해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BDS는 반이스라엘 NGO 단체로 베를린영화제에 대해 공식적인 보이콧을 선언했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에 대한 행태를 비판하는 영화인을 부당하게 대우한다는 이유에서다. 독일 연방의회는 2019년에 BDS를 반유대단체로 규정하는 데 결의했다. 스윈턴의 BDS 옹호를 두고 현지 언론들은 “베를린영화제측에도 부끄러운 사건”(<쥐트도이체차이퉁>), “유감스러운 일”(<타게스슈피겔>)이라고 평했다. BDS가 베를린영화제 보이콧을 선언했는데도 영화제에 참가한 이유에 대해 스윈턴은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어떤 일보다 여기 오는 걸 우선시했다. 그게 불참하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무력감과 절망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모든 강력한 행동이나 태도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페셜 갈라 부문에선 스윈턴이 직접 고른 <프렌드십스 데스>(1987) 한편만 상영됐다. 70년대 내전을 겪고 있는 요르단 호텔 방에서 종군기자와 스윈턴이 분한 안드로이드가 인생의 의미를 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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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베를린국제영화제 © Alexander Janetzko / Berlinale 2025 © Richard Hübner / Berlinale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