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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5] 부산영상위원회 아카이브 총서 <부산의 장면들> #1, ‘부산+’, <헤어질 결심> 류성희 미술감독 인터뷰
김소미 사진 백종헌 2024-11-18
감정의 무늬를 새기다

- 영화미술 작업을 하면서 감각한 부산 특유의 지역성 또는 지형적 특성이 있다면 무엇이었나.

기본적으로 박찬욱 감독님이 부산을 굉장히 좋아한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부산은 시대와 밀착한 장소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도시, 장소성이 겹겹이 함축되어 있는 도시가 아닌가 한다. 굉장히 오래된 건물과 동네부터 센텀시티에 이르는 초고층 빌딩이 공존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산과 바다가 함께 있고, 골목골목 사이의 정취도 고유하다. 특히 산동네 촬영, 추격 신 촬영에서 강점을 발휘하는 것 같다. 서울과 달리 동선이 매끄럽게 한눈에 파악되지 않고 길들이 드라마틱하게 꺾이면서 어디로 연결될지 모르는 느낌이 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야말로 영화적인 도시다.

- 대동맨션, 유창빌라 등 오래된 아파트 외부에서 서래의 집과 월요일 할머니 집 외부 전경을 찍었다. 실내 세트를 만들 때 극 중에서 연결성을 갖는 외부 전경도 섬세히 고려할 수밖에 없을 텐데 인상 깊게 본 지점이 있나.

사실 오래된 빌라의 외관은 한국 어디나 비슷하다. 아파트나 빌라라는 공간 자체가 익명성을 위해 디자인된 건축물이기도 하니까. 핵심은 그 건물이 어떤 식으로 자리하고 있느냐다. 제작부에서도 헌팅할 때 건축물의 스타일보다는 시선의 각도를 중요하게 고려했을 것 같다. 해준이 서래 집을 망원경 너머로 볼 때의 각도, 차 안에서 아파트 창 너머를 관찰할 때의 거리감 같은 것들이 중요했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부산의 아파트들은 언덕 위에 있어 예기치 못한 시선과 관점을 만들어준다. 그러니까 개별 건물의 디자인이나 외형보다는 지형과 얽혀서 비로소 생겨나는 느낌이 무언가 다른 요소를 만든다.

- <헤어질 결심>은 오픈세트를 다수 활용했다. 대표적으로 한국은행 부산본부에 꾸려진 부산 경찰서 내부가 인상적이다.

실제 경찰서 로케이션을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아무리 찾아도 감독님 눈에 차는 경찰서가 없었다. 비교하자면 봉준호 감독의 경찰서는 현실성이 굉장히 중요한 반면에 박찬욱 감독의 경찰서는 한국영화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그리고 규모감이 확실한 공간이어야 했다. 초기엔 제작진도 <헤어질 결심>이 판타지 장르도 아닌데 관객들이 낯선 경찰서를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했다. 감독님은 연출이 받쳐준다면 가능하리란 자신감이 있었다. 지금의 경찰서가 구현된 데에는 박찬욱 감독님이 확신을 갖고 밀어붙인 덕이 크다. 우선 한국은행 부산본부가 갖고 있는 요소들이 우아하고 훌륭했다. 기존 대리석 바닥과 천장을 영화에 그대로 노출시켰다. 오픈세트는 재료비를 절약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 영화 만들기는 항상 이런 식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제작비나 여건의 한계와 실제적인 조건들을 바라보면서 최선의 결과를 내는 것이다.

- 해준의 사무실 바로 맞은편 창가 복도를 따라 후배 경찰들의 책상을 나란히 배치한 구조도 특이했다.

완전히 영화적인 설계인 셈이다. 감독님이 미리 콘티를 꼼꼼히 그리는 분이기 때문에 미술팀도 사전에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구조를 짤 수 있다. 헌팅 후 러프하게 콘티를 그려서 아이디어를 주고받고 이를 보완해가는 과정에서 감독님이 구현하고 싶은 동선이나 움직임을 파악한다. 거기에 맞춰서 미술팀이 설계를 더하는 식이다. <헤어질 결심>에서도 그 과정에서 흔히 관공서에서는 쓰지 않는 동선들이 생겨났다. 오래된 관공서는 편의에 의한 권력 지향적 동선으로 짜이게 마련인데 이런 관성을 따르지 않고 영화적인 움직임을 생각하다보면 디자인 면에서도 새로운 점이 생겨난다. 박 감독님과 영화할 때 재밌는 게 바로 이런 부분이다. 경찰서라는 익숙한 출발지에서 시작했지만 도착지는 언제나 예상과 다르다. 늘 신기한 모험이다.

-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에 지은 실내 세트 중 작품의 핵심이 되는 서래와 기도수의 집 이야기를 해보자. 복도를 기준으로 거실은 기도수의 공간, 부엌은 서래의 공간으로 나누어 접근했다. 거실은 독특한 앵글 덕에 천장까지 각인된다.

작지만 굉장히 심혈을 기울였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 공간은 한때 기도수에게 지배되었던 곳이다. 등장인물이 영화에 계속 나오면 캐릭터와 장소가 함께 분위기를 만들어가게 되는데, 정작 인물은 빨리 퇴장하고 장소만 남게 되면 오히려 세트의 역할이 커지게 된다. 미술감독으로선 더 어려운 작업이 된다. 실제로는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지만 장소로서 계속 존재하게 만들어야 한다. 기도수의 거실은 어떤 디자인 레퍼런스도 없었다. 우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의 공간은 어떠할지 질문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일종의 녹음실과 비슷한 형태로서 방음벽을 세우려 했다. 벽과 천장에 흡음 역할을 하는 구조물들에 신경을 쓴 이유다. 소파 뒷면의 울퉁불퉁한 나무 재질의 조형물은 녹음실에 계란판처럼 불규칙한 흡음 벽을 세워둔 것을 재해석해봤다. 아파트에서 클래식 음악을 크게 듣는 사람이 실내 인테리어의 어떤 부분에 돈을 투자할까 생각하다가 정리한 아이디어다. 나무 소재로 불규칙하게 높낮이가 표현된 음파 모양의 디자인도 가미해보았다. 커튼 뒤의 중문을 닫으면 완전히 자신만의 성이 완성되는 느낌이 들도록.

- 박찬욱과 류성희의 컬래버레이션으로 벽지가 대표적으로 언급된다. 그중 <헤어질 결심>의 벽지는 그동안 나온 인상적인 벽지 디자인 중 가장 회화적이고 모호한 패턴이 아닐까 싶은데.

물결, 파장, 파동의 컨셉은 처음부터 확고했다. <헤어질 결심>은 둘 사이에 오가는 어떤 기류들에 관한 영화다. 조용히 잠자코 있어도 무언가 진동하고, 끊임없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사라지는 부분들을 미술적으로도 표현하고 싶었다. 고요하지만 격렬한 감정을 대변하는 것이다. 다만 이런 컨셉만 가지고는 우리가 의도하려는 미술적 은유가 정확히 작동하지 않을까봐 걱정을 많이 한 것도 사실이다. 서래 부엌의 벽지를 결정하기까지 총 5개 버전을 제작해 끝까지 고심했다.

- 벽지만큼 신경 쓴 것이 부엌 수납장 공간의 구도와 배치다.

벽지는 표현적이더라도 살림과 세팅은 어느 정도 현실적이어야 관객이 받아들인다. 소품의 세팅까지 관념적으로 보이면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 박물관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미술감독으로선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결과값을 얻을 수는 있어도 그 설정을 온전히 연기의 힘으로 끌고 가야 하는 배우에게 부담이 될 확률도 있다. 만약 <헤어질 결심>의 벽지가 회화적으로 보인다면 그건 아마도 벽면에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박쥐>와 비교해보더라도 차이가 확실하다. <박쥐>엔 이것저것 현실적인 가구와 소품들이 벽면을 채우고 있다. <헤어질 결심>에선 고민 끝에 파동과 파장의 느낌에 집중하기로 하고 다 덜어냈다. 작은 벽 선반 하나를 제외하고는 벽에 아무것도 부착하지 않았고 수납장 위의 소품들도 완전히 리얼하지만은 않은 방식으로 가로로 늘어놓았다. 미술팀원들도 모두 다 동의하지는 않았던 설정이다. 어느 순간 벽지 이미지가 가진 느낌이 훅 밀려오도록 과감하게 밀어붙인 것인데, 덕분에 <올드보이> 이후로 어깨가 가장 무거웠다. (웃음)

- 미술이 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기류와 감정을 대변하는 만큼 배우의 연기와 시너지를 내는 순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서래가 해준에게 자기가 어렵게 밀입국한 과정을 들려주지 않나. 그 장면을 촬영할 때 현장에서 제작진들도 함께 감응했던 것 같다. 그때 나도 안도했다. 사실 이 장면을 촬영하기 전까지만 해도 벽지가 조금 과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님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리얼베이스가 강조된 작품이고 스태프 구성을 보면 전작들에 비해 새로운 인물들이 다수 늘어났다. 그러다보니 나로서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한국영화는 다이내믹하기도 하지만, 범용되는 미술의 정도라고 할까, 허용치가 한정적이기도 하다. 경찰서나 벽지 미술에 대해 인위적이라거나 과하다고 생각하는 의견도 나올 법했다. 그러다 서래가 힘들었던 밀입국 과정을 이야기할 때 물결처럼 보이는 벽지가 맞아떨어지면서 스태프들까지 설득했다. 그 순간이 굉장히 기뻤다. 이 장면을 찍은 직후에 촬영감독이 이 벽지의 필요에 완벽히 납득했다는 피드백을 들려줬다. 협업의 예술인 영화 작업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증명의 길이 지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첫 느낌에 모두를 쉽게 설득하는 미술이 언제나 최선의 선택은 아닐 수도 있겠다.

맞다. 서래의 부엌 이미지는 그것만 딱 떼어놓고 보면 누군가에게 ‘저게 뭐야’ 하고 이질감을 주는 세팅일 수 있다. 영화 작업을 하다보면 자주 드는 생각인데, 모든 영역의 에너지의 합이 절묘하게 맞아야 한다. 하나라도 어긋날 경우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 같다. <올드보이>의 표현적인 벽지도 배우 최민식의 에너지, 송종희 분장감독이 만들어낸 헤어스타일, 모든 것을 이끌고 가는 박찬욱 감독의 연출력 속에서 비로소 살아난 것처럼 말이다.

“패턴을 좀… 알고 싶은데요” 류성희 미술감독의 포토 코멘터리

영화미술은 어떻게 작중 인물의 감정을 관객의 내면까지 전염시킬까. 류성희 미술감독이 새겨넣은 미묘한 감정의 기류들은 지도, 내비게이션, 벽면, 유리창, 선반의 형태와 무늬로 고요히 새겨져 있다.

한국은행 부산본부에서 촬영된 해준의 부산 경찰서 내부의 창 디자인도 주목해보자. 창의 블라인드, 그리고 유리창의 구조적인 무늬가 서래와 해준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마치 경찰서의 창살 같은 모양을 유리창에 적용했다. 첫 만남 이후 두 사람의 관계에서 미술적으로 조금씩 패턴을 쌓아가고 싶었다. 두 사람의 관계 진전을 가로막는 요소들, 이를테면 용의자와 형사의 관계라는 점, 대화가 항상 잘 통하지는 않는 언어의 제약 등을 아울러 시각화시켜보자는 생각이었다.”

부산 경찰서 심문실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이포 경찰서 내부의 심문실이지만, 벽면의 미술은 오히려 존재감을 드러낸다. 류성희 미술감독은 불규칙한 격자무늬와 나무 장식, 가로선을 더하는 미니멀한 조명까지도 세심하게 신경 썼다. “심플해 보이지만 신경을 많이 쓴 공간이다. 색이 다른 나무 하나하나씩 면을 맞춰보고 단조롭지 않게 엑스자 디자인도 넣어보는 식으로 조형을 짰다. 박 감독님과의 합작품이다. 심문실이라기보단 갤러리 같은 공간인데, 감독님이 다양한 나무판이 콜라주된 디자인을 레퍼런스로 보내줘서 이포 경찰서의 디자인으로 활용해보게 됐다. 박찬욱 감독님이 보내주는 디자인이나 사진이 좋은 영감을 준다.”

해준의 사무실 내부에서 디테일이 돋보이는 소품 중에는 관내 지도도 빼놓을 수 없다. 경찰서 내부에 흔히 걸려 있을 법한 소품이지만 미니멀한 디자인과 색감부터 남다르다. 지도가 하나의 무늬라면 이 또한 류성희 미술감독이 강조한 ‘패턴’이기도 하다. 류 미술감독은 “영화상에서 아주 강조되지는 않지만 <헤어질 결심>을 준비하면서 무척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 지도와 내비게이션 디자인이다. 이 부분만큼은 감독님보다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웃음) 해준이 지도와 내비게이션을 따라 서래를 열심히 찾아가지만 마지막에는 발밑에 두고도 결국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인간 문명이 만들어낸 여러 문양과 무늬를 영화 속에 다양하게 새겨보고 싶었던 이유”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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