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이라는 제목을 구성하는 두개의 요소가 있다. 부산이라는 장소, 그곳으로 향하는 무언가. 그런데 영화는 이중 후자만을 줄곧 조명 한다. 부산은 정말 안전한가. 수안(김수안)은 정말 부산에 무사히 도착 했는가. 영화에서는 끝까지 종착역에 대한 답을 주지 않은 채 그저 인물들을 끌어당기는 서사의 동력원으로만 활용한다. 그런데 사실 <부산행>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촬영했다고 한다면 믿겠는가. KTX 세트가 제작되고 촬영이 진행된 곳이 바로 해운대구 한복판의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대전역과 동대구역이라 믿었던 공간들 또한 부산의 여러 철도 시설에서 촬영했다. 그러니까 부산을 향해 달리던 이야기는 이미 처음부터 부산에 도착해 있던 셈이다.
1157만 관객을 동원한 <부산행>은 영화도시 부산의 또 다른 모습을 조명한다. KTX 세트 제작을 진두지휘한 이목원 미술감독과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민정은 제작실장, 이형덕 촬영감독, 허명행 무술감독, 특수분장 테크니컬 아트스튜디오 셀(CELL)의 곽태용 대표, 그리고 연상호 감독이 증언한 <부산행>의 제작기를 전한다. 당시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를 담당한 부산영상위원회 스튜디오팀 김윤재 차장, 로케이션 지원을 담당한 부산영상위원회 경영지원팀 이승의 팀장이 귀띔 해준 제작 지원의 숨겨진 비하인드도 함께 담았다.
고증과 변형 사이에서, KTX 세트 제작기
객차 내부의 구조가 이전 객차와 충분히 구별되지 않으면 지속적인 후퇴의 리듬을 감지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에 일부 칸의 모습은 실제 설계와 다르게 제작되었다. “실제로는 화장실이 없는 연결부에 화장실을 만들거나, 자판기의 디자인을 바꾸는 등 변주를 줘 신이 넘어갈 때마다 다른 칸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지게끔 작업 했다.”(이목원 미술감독) 이목원 미술감독은 재현이 가장 힘들었던 부분으로 KTX의 외부 도장을 꼽았다. “철도에 고압 전류가 흐르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 색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떤 색으로 도색하더라도 매번 실물과 다른 느낌이 나는 거다.” 알고 보니 KTX의 외벽 마감은 홀로그램 시트지로 광량과 관찰 각도에 따라 색이 바뀌는 재질이었던 것. 좌석 또한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물품이 아니었기에 폐차된 무궁화호의 패브릭을 리폼해 쓰는 등 실제와 최대한 비슷한 색감과 질감을 구현하려 노력했다.
20량 길이의 KTX 전체를 제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술팀은 객실 2량과 연결부 3량, 총 5량의 세트를 제작한 후 장면에 맞추어 세트 내부를 개량하며 촬영을 진행했다. KTX는 한국인의 일상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교통수단인 만큼 사소한 소품의 차이에서도 쉽게 이질감을 느낄 우려가 있다. 심지어 KTX의 도면은 철저한 대외비였기에 세트 제작에 필요한 도면조차 구할 수 없었다. 이에 이목원 미술감독을 비롯한 <부산행> 미술팀은 KTX에 탑승해 서울과 부산을 십수번 오가며 직접 도면을 그렸다. “KTX 내부가 작기 때문에 디테일한 마감이 전부 화면에 가까이 잡힌다. 실제 기차와 최대한 비슷하게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이목원 미술감독)
해운대의 중심에서 촬영한 <부산행>
<부산행>의 러닝타임의 대부분은 부산을 향해 질주하는 KTX 열차의 내부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실제로 달리는 KTX 열차 위에서의 촬영은 고사하고 실제 객차의 일부를 대여해 촬영하는 것 또한 여건상 불가능했다고. 결국 열차 내부를 그대로 본뜬 세트를 제작하는 것이 지상과제가 되었다. 직사각형 형태이면서 당시 국내에서 가로 너비가 가장 긴 촬영장이었던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는 길쭉한 KTX 세트를 담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서울의 감독들이 한번쯤 전화를 받으며 꼭 해보고 싶은 말이 ‘나 지금 부산이야’라고 한다. 그만큼 부산에서 촬영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이승의 팀장)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의 장점은 단지 설비에 국한되지 않는다. 김윤재 차장은 “해운대의 중심에 위치해 접근성이 좋아 숙소에서 도보나 자전거로 출근 하는 스태프들도 있었다”라고 단란했던 당시 분위기를 회고했다. 무엇보다 <부산행>은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의 대여료 감면 제도의 대표적 수혜자다. 부산 지역에서의 촬영 분량이 전체 회차의 50% 이상일 경우 스튜디오 대여료의 30%를 감면해주는 정책이다. 한정된 제작비로 작품에 알맞은 최적의 인프라를 활용한 모범 사례라 부를 만하다.
좁은 차내에서의 촬영 비법
아무리 공간을 확보한다고 하더라도 기차 안은 좁은 법. 연상호 감독과 이형덕 촬영감독은 주어진 공간의 최대치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끝없는 토의를 거쳤다. “주인공들의 동선을 길게 보여줄 수 있는 앵글 및 카메라워크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 캐릭터들이 서 있는 동선과 동선을 연결하는 카메라워크로 탄력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연상호 감독) “객차 천장에 일종의 레일을 깔고 줄을 매달아 아래로 내려 카메라를 달았다. 카메라가 위아래, 좌우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배우와 좀비들이 카메라로 달려오는 그 속도감을 그대로 담는 데 용이했다.” (이형덕 촬영감독)
KTX 격투의 비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홀로 좀비 떼와 싸우던 상화(마동석)의 든든한 어깨와 팔뚝을 기억하는가. 두명이 등을 맞대야 겨우 지나갈 수 있는 KTX 객실의 좁은 통로는 화려한 격투 연기에도 걸림돌이었다. “다른 열차에 비해 KTX가 좁다. 속도를 내기 위해 불필요한 공간을 최소화했기 때문이다.”(이형덕 촬영감독) 이에 미술팀은 세트의 통로를 실제 너비보다 조금 더 넓게 설계했다.
“좁은 공간이기에 한쪽을 조금만 넓혀도 비율이 크게 달라진다. 익숙한 느낌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넓게 만들고자 했다.” (이목원 미술감독) 연기 동작의 치밀한 설계도 필수였다. 허명행 무술감독은 “편안한 동작이 나오는 것보단 불편하게 나오는 동작이 더 재미있다”며, “생활감 있고 밀도 높은 공간” 제약을 오히려 창의력의 원천으로 활용했다. “기차 내의 의자 등 구조물이 장애물이 되기도 하고 방어물이 되기도 했다.” 곽태용 대표는 “기차 세트 내부의 의자, 천장에 달린 모니터 등은 안전 소품이다. 모든 의자를 제작할 수는 없어서 스무개 정도를 말랑말랑하게 제작해 액션이 펼쳐지는 공간에 배치했다” 라고 밝혔다.
목조 세트는 달리고 싶다
열차의 차창 밖으로는 아름다운 국토의 풍경이 넘실대지만 실제 세트는 실내에 가만히 서 있다. 창문 너머를 그린스크린으로 처리해 CG로 해결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부산행> 제작진은 세트 뒷면에 대형 LED 패널을 제작한 후 배경을 직접 영사해 함께 카메라에 담는 방식을 택했다. 아시아 최초로 시도한 후면영사 방식에 제작진들도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기차의 내부에 반짝거리는 소재가 많다. 창문을 통해 LED 패널의 빛이 들어오면 이 소재들에 자연광 같은 글로시한 질감이 가득 묻어나게 된다. CG로는 이 질감까지 구현할 수 없다.” (이목원 미술감독) 스크린에 영사된 풍경은 촬영팀이 실제로 서울발 동대구행 KTX를 타고 촬영한 영상이다. “LED 화면은 2K 영상인데 주 카메라인 알렉사 카메라는 4K이다 보니 아무래도 화질에 차이가 난다. 인물에 포커스를 맞춰 뒤쪽을 포커스 아웃하는 방식으로 촬영해 균형을 잡았다.”(이형덕 촬영감독) 움직이는 풍경만으로도 실제로 달리는 감각이 들어 배우와 스태프가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세트 하단에 장착된 에어펌프는 세트에 가벼운 흔들림을 더해주었다. 아마 <부산행>의 세트는 촬영 내내 자신이 진짜 KTX가 되어 경부고속선을 누비는 꿈을 꾸고 있지 않았을까.
열차 밖은 더 위험해, 대전역과 동대구역의 실체
<영화부산> 2016. VOL.18 ‘씨네必 인터뷰–안주하지 않는 감독, 연상호’ ‘부산 촬영 클로즈업-영화 <부산행> 제작기’, ‘[스페셜] <부산행> 스탭들이 재구성한 영화 촬영 현장’(<씨네21> 1065호) ‘[스페셜] 힘 있고 단단하게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연상호 감독 인터뷰’(<씨네21> 1064호) 발췌
KTX 내부 세트도 어려움의 연속이었지만 열차 외부의 로케이션을 찾는 일은 더더욱 어려웠다. 대전역 장면은 행신역, 삽교역, 청주역, 동대구역, 그리고 부산의 부전역에서 분량을 나누어 촬영을 진행했다. 특히 동해선 부전역에서 촬영한 분량 중 하나는 좀비로 변한 군인 무리가 유리창을 깨고 플랫폼 연결로 위로 쏟아져 들어오는 장면이다. “유리문이 깨질 때 넘어지는 인물들은 전부 무술팀이다. 6~7명 되는 조를 6조 정도 짜서, 더미 위에 1조가 넘어지면 그 위에 더미를 쌓고 2조가 그 위로 넘어지고… 이걸 10컷 가까이 레이어별로 분할촬영했고, 최종적으로 CG팀이 합성했다.”(허명행 무술감독)
동대구역은 작중 생존자들이 선로 위에 내려 열차를 갈아타는 장소다. 하지만 KTX 선로에는 위험한 고압 전류가 24시간 흐르기 때문에 대부분의 역에서는 사실상 촬영이 불가능했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장소가 바로 부산진구에 위치한 부산철도 차량정비단이었다. 민정은 제작실장은 “부산 세트와 가까웠기 때문에 제작해놓은 KTX 실내 세트를 이동시켜 촬영에 활용할 수 있었으며, 다른 차량기지들에 비해 열차들의 통과나 운행이 적어 그나마 촬영 스케줄에 대한 협의가 가능했던 점”을 로케이션 선정의 이유로 밝혔다.
세트를 철거할 수밖에 없던 아쉬움
이처럼 제작진의 수많은 노고가 만나 탄생한 <부산행>의 KTX 세트는 아쉽게도 촬영 완료 후 철거되었다고 한다. 이승의 팀장은 당시 세트를 보존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던 노력을 들려주었다. 부산관광공사뿐만 아니라 기장군청, 한국철도공사, 심지어 어린이 직업체험관에까지 연락했지만 모두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부산행>이 크게 흥행하자 모든 곳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그때 그 기차, 아니 의자 시트라도 안 남아 있냐고. (웃음)” 연상호 감독 또한 “영화에서 기차를 촬영하는 것이 고역이다. 세트가 있으면 거기서 찍으면 되니 까.” 이후의 한국영화에도 더욱 편리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로케이션 개발뿐만 아니라 세트의 보존 방법과 문화관광자원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이승의 팀장)
“<부산행>이 해외에서 흥행하던 당시 필리핀에 간 적이 있다. 부산에서 왔다 하니 사람들이 실제로 있는 도시냐며 깜짝 놀라더라. 미국의 다른 영화인들은 부산을 ‘안전한 도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영화 콘텐츠의 파급효과가 도시의 이미지를 좌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승의 팀장) 천만 영화가 하나 탄생할 때마다 핵심 장면의 촬영지가 유명 관광지로 주목받는다. 하물며 그곳이 영화의 이름을 장식한다면 어떠하겠는가. 부산이 낳은 콘텐츠가 다시 부산을 알리는 선순환을 기쁘게 바라보며 영화도시 부산의 위상을 재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