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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씨네21>의 추천작 가이드 ③
씨네21 취재팀 2024-10-01

호랑이 소녀 Tiger Stripes

아만다 넬 유/말레이시아, 타이완, 싱가포르,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카타르/2023년/96분/특별기획 프로그램 : 10대의 마음, 10대의 영화

성장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럽지만, 그 과정을 트라우마로 만드는 것은 환경이다. 반에서 처음으로 생리를 시작한 자판은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 생리대를 잘못 간수하면 정신이상자가 된다거나 귀신이 붙는다는 괴소문도 함께다. 스트레스 때문일까, 본성일까. 자판의 손에 호랑이의 발톱이 돋아난다. <호랑이 소녀>는 여성의 신체를 같은 여성마저 존중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통해 말레이시아의 전근대적 사회와 교육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에 더해 성장의 자리에 놓인 변태의 과정은 내적 고통의 표면화를 넘어 고양이와 호랑이, 유인원과 인간 사이 어디로든 뻗어갈 수 있는 무한한 자아의 긍정으로 확장된다. 아만다 넬 유 감독은 묵직한 주제의 보디 호러 위에 만화적 터치를 더하는 능란한 솜씨로 데뷔작을 이끌어간다. 이토록 혈기 왕성한 맹수의 충동을 동력 삼아 달려나가는 <호랑이 소녀>는 그릇된 규범을 지적하고 파훼하는 단계적인 사냥의 절차를 한 호흡에 달성한다. 제76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을 수상했다. /박수용 객원기자

백의창구 Mongrel

쟝웨이량, 인요우챠오/타이완, 싱가포르, 프랑스/2024년/130분/아시아영화의 창

제아무리 성실한 사람이라도 생존의 문제 앞에서 마주한 윤리의 늪에서는 빠져나오기 어렵다. 유선 이어폰을 꽂은 채 묵묵히 뇌 병변 환자의 분뇨가 묻은 엉덩이를 닦는 주인공 움은 본래 어진 성정의 소유자다. 문제가 있다면 움과 동료들은 전부 미등록 이민자라는 점이다. ‘보스’는 그들의 처지를 악용하여 몇달째 임금을 주지 않는다. 분노에 찬 동료들이 파업을 결심한 가운데, 움은 자신이 맡은 환자인 휘와 그의 노모를 모시는 데만 열중한다. 도처에 널린 부조리를 애써 외면하며 최선을 다하는 그에게 야속하게도 존엄을 뒤흔드는 선택의 순간들이 다가온다. <백의창구>의 카메라는 소박한 양심이 가혹한 상황 속에서 침잠하는 매우 느린 속도를 포착한다. 선의의 퇴색은 타락이나 배신처럼 빠르지 않다. 그저 생존의 법칙 아래서 서서히 삼투될 뿐이다. 긴 호흡과 가혹한 프레임으로 담은 성실한 노동자의 고뇌는 노력의 시간을 알기에 더욱 가혹하게 다가온다. 제77회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부문 특별 언급을 받았던 작품이다. /최현수 객원기자

신성한 나무의 씨앗 The Seed of the Sacred Fig

모함마드 라술로프/이란, 프랑스, 독일/2024년/168분/아이콘

여성들의 히잡 의무 착용과 관련된 정부 지침에 반기를 든 거센 시위가 이란에서 시작됐다. 주인공 이만은 얼마 전부터 국가 소속의 조사관으로 승진했다. 그의 업무는 이슬람 교리에 반하는 행위를 조사하는 것이다. 때문에 히잡 반대 시위에 참여하는 자식들을 엄격하게 훈육하지만 두딸 중 누구도 아버지의 위압에 굴하지 않는다. 이만의 승진을 위해 그의 의견에 동조해주는 듯했던 어머니도 이만이 딸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가두자 결국 자식들을 돕기 위해 나선다. 이만이 국가로부터 지급받은 권총을 훔치는 것을 시작으로 딸들은 아버지의 가부장 권력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한다. 이란에서 히잡 반대 시위가 격렬하게 일던 시절에 촬영된 작품으로, 이란의 여성 억압적인 정책과 신권 정치의 현실이 위계적인 한 가정의 모습에 압축적으로 담겼다. 극화된 가족의 이야기만큼이나 핸드폰으로 촬영된 적나라한 시위 장면들이 삽입돼 전쟁과 다름없는 당시의 상황을 현실감 있게 전한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는 서사, 편집의 흐름이 다소 거친 부분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영화가 담아낸 이란 여성들의 의지와 용기는 영화 안팎을 연결하며 강렬하게 빛난다.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여자배우들에게 히잡을 씌우지 않고 <신성한 나무의 씨앗>을 촬영했다는 이유로 징역 8년형, 재산몰수형 등을 선고받았다. 이후 비밀리에 올해 칸영화제에 참석한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신성한 나무의 씨앗>으로 칸영화제에서 특별각본상을 수상했다. /조현나

유니버설 랭귀지 Universal Language

매튜 랭킨/캐나다/2024년/89분/월드 시네마

<유니버설 랭귀지>는 캐나다 매니토바주의 도시 위니펙에 관한 이야기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영어 대신 페르시아어를 사용한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카페 팀홀튼은 커피 대신 각설탕과 처이를 내주고, 브라운관 속에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광고는 마치 시간이 1980년대에 동결된 듯한 인상을 준다. 가이 매딘이 <나의 위니펙>에서 “몽유병 환자들이 곱절은 많은 지루한 도시”라고 평했던 위니펙은 매튜 랭킨의 손을 거쳐 80년대 테헤란의 풍경으로 다시 태어난다. 폭설과 추위가 가득한 도시를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모흐센 마흐말바프 등 이란 뉴웨이브 영화 속의 한 장면으로 여기게 만드는 것은 언어와 풍습만이 아니다. 칠면조에게 안경을 빼앗긴 아이, 그 아이를 위해 꽁꽁 언 얼음 속에서 발견한 돈을 꺼내려는 친구들, 공무원 생활을 관두고 어머니를 보러 여로에 오른 남자까지. <유니버설 랭귀지>의 블랙코미디를 연출하는 인물들에게서 어딘가 키아로스타미적인 순박함을 발견하게 된다. 자칫 기표로 증발할 수도 있는 위니펙이라는 지명은 도처에 배치된 역사적 맥락을 통해 정체성을 회복한다. 매니토바주의 설립을 이끈 루이 리엘의 동상과 1995년 퀘벡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에 대한 언급은 캐나다의 역사를 지탱하는 부조리들을 은유적으로 소환하고 있다. 몬티 파이튼식 부조리극의 흥미로운 변주로 20세기 캐나다를 반추했던 전작 <20세기 최고의 수상>의 야심을 훨씬 정교한 필치로 세공한 매튜 랭킨의 감각이 돋보인다. 올해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되어 관객상을 거머쥐었다. /최현수 객원기자

바늘을 든 소녀 The Girl with the Needle

마그너스 본 혼/덴마크, 폴란드, 스웨덴/2024년/122분/월드 시네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코펜하겐, 전쟁터로 떠난 남편의 생사를 확신할 수 없는 카롤리네는 그의 죽음을 짐작하고 공장장과 새로운 만남을 갖는다. 아이를 가졌지만 새 가정을 꾸리는 데 실패한 그는 설상가상으로 실직까지 한 채 길거리를 떠돈다. 그때 카롤리네 앞에 나타난 초로의 여성 다그마르는 아이를 온화하고 부유한 가정에 입양해주겠다며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그들은 정신적 고통이 뒤따르는 날에 함께 모르핀을 나누고, 적적한 날이면 영화를 구경하며 빠르게 가까워지지만 다그마르가 보여주는 카롤리네의 현실은 지극히 비참하고 비극적이다. 카롤리네처럼 자신의 아이를 맡기러 오는 사람들이 다그마르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카롤리네는 마음속에 움트는 죄책감을 꿋꿋이 외면한다. <바늘을 든 소녀>는 1910년대 덴마크의 유아 연쇄살인마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색했다. 흑백영화로도 감출 수 없는 인물의 날 선 표정과 불안한 행동이 불쑥 튀어나와 바늘처럼 가슴을 쑤신다. 제77회 칸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이자연

뭐 그런 거지

이하람/한국/2024년/77분/지석

개성이 통통 튀는 오프닝으로 시작하는 <뭐 그런 거지>는 초반의 명랑한 선언과 달리 유혈이 낭자한 잔인한 여정을 그려낸다. 다른 행성에서 지구를 방문한 남녀는 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살인을 저지른다. 장총, 묵직한 돌멩이, 긴 밧줄 등 그들의 시간을 상상하게 되는 도구들과 기괴한 가면까지 모든 소품은 영화의 그로테스크함을 증폭시킨다. 정처 없이 떠도는 두 방랑자의 즐거운 살생은 도덕이나 윤리의 화살표를 가뿐히 뛰어넘어 현대사회에 농담 같은 일침을 가한다. 허무맹랑한 스토리, 단순한 시퀀스, 철학적인 대화와 황당한 웃음이 폭우처럼 쏟아지지만 그 빗줄기를 기꺼이 맞고 싶을 만큼 몽환적으로 흘러간다. 두 외계 커플은 과연 지구인들과 달리 완벽한 살인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 도저히 묵음 처리되지 않는 둘만의 사랑을 지구에 각인시킬 수 있을까. 어떤 장면도 쉽게 단언할 수 없는 이미지의 조각가 이하람 감독의 장기가 십분 녹아 있다. /이자연

빛이 산산이 부서지면 When the Light Breaks

루나르 루나르손/아이슬란드, 네덜란드, 크로아티아, 프랑스/2024년/82분/월드 시네마

애도의 순간에도 온전히 슬퍼할 수 없는 존재는 고통스럽다. 대개 이런 상황은 어디에도 말 못할 비밀이 감정을 가로막고 있다. 저녁 어스름을 바라보며 비밀 애인과 먼 미래까지 이어질 사랑을 약속하던 위나에게도 결국 이런 순간이 찾아온다. 날이 밝는 대로 오랜 연인에게 결별을 고하고 당당하게 사랑을 이어가자던 남자는 터널 속 화마와 함께 말없이 사라지고 만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었지만, 위나가 비통해할 자리는 충분치 않다. 남자의 오랜 연인과 동창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그의 죽음을 온몸으로 슬퍼하기 때문이다. 밀회의 주인공이 내막을 모르는 남자의 애인과 장례식에서 함께 죽음을 되짚는다.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설정이지만, 애도의 드라마는 격정적인 파국보다는 미묘한 연대와 성장에 집중한다. 아이슬란드의 빼어난 풍광에서 섬세한 정서를 발굴하는 루나르 루나르손의 장기가 이번에도 빛을 발한다. <빛이 산산이 부서지면>에 담긴 건조하고 포근한 햇살은 상실을 마주한 인물들에게 온기 가득한 포옹을 선사하고 있다. /최현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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