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기록영화촬영소 앞. 북한 영화연구자 로만 후사르스키와 영화사 연구자 한상언(왼쪽부터).
식민과 분단을 중심으로 한국·북한 영화사를 연구해온 한상언 영화연구소 소장(<영화 운동의 최전선> <해방공간의 영화·영화인> <조선영화의 탄생>, 월북 영화인 시리즈 <문예봉 전> <강홍식 전> <김태진 전>)이 고서 수집의 아지트인 천안 노마만리 책방을 떠나 잠시 폴란드로 향했다. 헝가리 출신의 북한 영화연구자 거보르 셰보와 뜻을 맞춰 폴란드의 한 영화촬영소에 보관된 윤용규 감독의 <춘향전>을 보기 위해서다. 그로 하여금 “뻔하고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북한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크게 바꿔” 놓은, 폴란드에서 만난 세편의 북한영화를 소개한다.
영화 <춘향전>의 첫 번째 릴을 꺼내든 기록영화촬영소 담당자 실비아.
지난 4월 헝가리 출신 북한 영화연구자인 거보르 셰보에게서 1959년 북한에서 제작한 윤용규 감독의 <춘향전>이 폴란드의 한 영화촬영소에 보관돼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작품은 1959년 제1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하여 사회주의권 국가들 사이에서 널리 상영된 적이 있었기에 해외의 필름 아카이브 어딘가에는 이 필름이 소장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예상처럼 이 영화가 폴란드에 소장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귀가 번쩍 뜨였다.
폴란드에 보관되어 있는 <춘향전>은 크라쿠프 대학에 근무하는 종교학자이자 북한 영화연구자인 로만 후사르스키가 확인했다. 동구권 출신의 북한 영화연구자들을 만날 때마다 자국의 필름 아카이브를 뒤져 북한에서 공개하지 않고 있는 희귀한 필름을 찾아보라 귀띔해주었다. 내 말을 귀담아들었던 그가 폴란드 아카이브에 문의하여 받은 북한영화 리스트 안에서 윤용규의 <춘향전>을 발견했다고 한다. 기특한 일이다.
보고 싶은 필름이 소장된 것을 알았으니 그다음은 필름을 확인하는 게 순서였다. 마침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있던 거보르 셰보가 계약기간을 마치고 헝가리로 돌아갈 때 폴란드에 들러 로만 후사르스키와 함께 <춘향전>을 관람하기로 했다고 알려주었다. 나 역시 동참할 의사가 있음을 전했다. 단순히 필름을 확인하러 지구 반대편 폴란드까지 달려간다는 것은 무모한 일임이 틀림없다. 주머니 사정도 생각해야 할 테고 하던 일도 잠시 멈춰야 하며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고민해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얼마간 고민을 거듭하다 얻은 결론은 이번 기회가 아니면 또 언제 윤용규의 <춘향전>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동유럽 연구자들과 함께 폴란드와 헝가리의 거리를 누벼보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만사 제쳐놓고 폴란드로 떠나기로 했다.
동 시기 어느 영화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소련과 동유럽의 쟁쟁한 영화들을 제치고 제1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촬영상을 거머쥔 <춘향전>에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연극무대와 스크린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황철, 문예봉, 김선영 등 전설적인 배우들이 출연한다. 여기에 절제되고 정갈한 영상으로 상찬받은 <마음의 고향>(1949)의 연출자 윤용규의 완숙한 솜씨도 기대할 만한 부분이었다. 오랫동안 영화연구자들에게 윤용규 연출의 <춘향전>은 지구 어디엔가에서 봉인이 풀리기만 기다리고 있는 환상 속의 영화였다.
이 영화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바로 춘향 역을 맡은 우인희가 1970년대 후반 불륜을 이유로 공개 총살형을 당했고 이후 북한에서는 그가 등장하는 영상은 물론 제대로 된 사진 한장도 남김없이 없애버려 이제는 그 모습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이유에서 그렇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호사가적 취미를 지닌 사람들 역시 이 영화에 관심을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일례로 몇년 전 유튜브 <주성하TV>에서 우인희 사진을 최초로 공개한다는 영상을 올려 불과 며칠 만에 100만 조회수를 달성하기도 했다.
후사르스키가 입수한 리스트에는 <춘향전> 이외에도 꽤 많은 수의 영화가 있었다. 이중 1959년에 제작된 <애국자>와 1970년에 제작된 <한 자위단원의 운명>은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도 보관되지 않은 희귀 영화다. 우리는 1인당 100달러 정도의 비용을 내고 <춘향전>과 함께 <애국자>와 <한 자위단원의 운명>까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영화를 보기로 한 날은 2024년 5월29일이었다. 이날 오전 9시 폴란드의 기록영화촬영소(Wytwórnia Filmów Dokumentalnych i Fabularnych, 약칭 WFDiF) 앞에서 만난 우리는 후사르스키의 안내로 촬영소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1949년 창립한,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촬영소로 1944년부터 1994년까지 폴란드의 영화관과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뉴스영화(Polska Kronika Filmowa, 약칭 PKF)를 비롯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제작하던 곳이다. 안제이 바이다를 비롯해 전설적인 폴란드 영화감독들이 거쳐간 창작의 요람으로 현재도 영화촬영소로 운용되고 있다.
여러 동의 건물들이 산재해 있는 이곳은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 사회주의 시절에 건축된 낡은 건물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북한을 다녀온 적 있는 후사르스키는 마치 평양의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 온 것 같다고 했다. 필름을 보관하고 있는 곳 역시 사회주의 시절에 만들어진 작고 오래된 건물이었다. 담당자인 실비아씨와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작은 편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오래돼 보이는 독일제 필름 편집기가 있었다. 내심 극장 안에서 제대로 감상할 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화면도 침침하고 소리도 불명확한 열악한 편집기를 통해 관람해야 한다는 점은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보는 게 어디냐 하는 감지덕지한 생각도 들었다. 실비아씨는 미리 준비한 필름을 카트에 싣고 왔다. 우리가 볼 <춘향전>과 <애국자> <한 자위단원의 운명>이었다. 가장 먼저 확인한 영화는 <애국자>였다. 캔 안에는 이 필름이 상영된 이력이 표시되어 있었는데 1961년 이후 상영된 적이 없었다. 실비아씨가 필름을 편집기에 걸고 스위치를 누르자 필름은 드르륵 소리를 내며 춤추듯 움직였다.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흘러나오던 스피커에서 우리말 음악이 흘러나왔다. 폴란드어로 더빙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슈퍼임포즈로 폴란드어 자막을 넣은, 오리지널 사운드가 살아 있는 필름이었다.
북한에서는 1959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유격투쟁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제작했다. <애국자>는 송영의 오체르크(실화문학설)인 <백두산은 어데서나 보인다>(민주청년사, 1956)에서 소개한 항일유격대의 비밀 정보원 최병훈의 이야기가 원작이다. 이 영화는 일제의 학정으로 고향을 떠나 만주로 온 최병훈(한진섭)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주변 사람들은 물론 가족들에게까지 지탄받지만 실제로는 항일유격대의 비밀 요원으로 활동해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히고 결국 정체가 탄로나면서 죽음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송영과 주동인이 함께 쓴 흥미로운 시나리오에, 전동민이 연출하고 박병수가 촬영한, 마치 서부영화를 보는 것 같은 역동적인 화면과 뛰어난 배우들의 능숙한 연기가 어우러진 수작이었다. 특히 주인공 최병훈 역의 한진섭과 사돈 송용식 역의 남승민, 할머니 역의 김연실 등 해방 전 연극·영화 부문에서 활동한 배우들과 천리마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 <정방공>(1963)에 출연한 배우 최부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의미가 있었다.
<애국자> 상영이 끝나자 잠시 쉬면서 <춘향전> 보기를 기다렸다. 다들 영화가 어떻게 시작될지 궁금해했다. 나 역시 윤용규 감독의 <춘향전>에 대한 각종 문헌을 가지고 있음에도 영상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애국자>를 볼 때와는 마음가짐부터 달랐다.
필름을 걸고 편집기의 스위치를 올리자 음악과 함께 황철, 김동규, 문예봉의 이름이 화면에 나타났다. 아마도 오래된 필름을 다시 복사해 보관하는 과정에서 앞부분을 잘라 낸 것 같았다. 영화가 시작되자 떨리는 마음으로 한 장면 한 장면을 눈에 담았다. 사계절이 고루 담긴 아름다운 화면은 배우들의 움직임과 어우러져 역동적이기까지 했다. 너무 과하지도 너무 촌스럽지도 않은 컬러와 판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이용한 것은 지금은 사라져 아득하지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과거의 어떤 흔적을 발견한 것처럼 감동적이었다. 상영시간 때문이었는지 일부 장면들이 삭제되긴 했지만 지금 상태로라도 동 시기 어느 영화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뛰어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에는 이름만으로도 설레게 하는 전설적인 배우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 릴을 보며 찌릿한 전율을 느꼈는데 그것은 지금의 북한영화보다 뛰어난 완성도를 지닌 영화 속에 전설적인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던 것 같다.
특히 해방 전 연극무대를 호령했던 북한 최초의 인민배우 황철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점은 호기심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오른쪽 팔을 잃었지만, 이 영화에서 그는 표독하고 능글거리는 얼굴로 탐관오리 변학도의 모습을 능숙하게 연기했다. 사실 황철은 1930년대 동양극장 청춘좌에서 만든 최독견작 <춘향전>에서 이몽룡 역을 맡았었는데 20여년이 흘러 변학도를 연기하고 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의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마치 1930~40년대 연극, 영화로 만든 다양한 버전의 <춘향전>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모아 만든 것처럼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월매 역의 김선영 역시 1948년 시공관에서 공연된 극협의 <대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연기했다. 1935년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은 문예봉은 이몽룡의 어머니 역으로, 같은 영화에서 운봉 역을 맡았던 최운봉은 이 영화에서 또다시 운봉 역을 맡았다. 이몽룡 아버지 역을 맡은 김동규는 1940년 고협 창립 1주년 기념작인 유치진 각본의 <춘향전>에 출연한 적이 있고, 왕방울쇠 역의 유원준은 1980년 북에서 다시 만든 <춘향전>에서 변학도를 연기하며 윤용규와 더불어 공동 연출자로 나섰다.
영화가 끝나고 너나 할 것 없이 감동의 박수를 쳤다. 그러고는 윤용규의 <춘향전>이 국내외에 제대로 소개될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보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김정일이 영화 부문을 지도하던 시기인 1970년에 제작된 영화로 “불후의 고전적 명작”으로 불리는 중요한 영화다. 하지만 김정일의 부인이기도 한 영화배우 성혜림이 주인공으로 출연했기에 어느 때부터인가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 영화는 성혜림과 엄길선 등 1960년대 북한의 청춘스타들을 보는 재미는 있으나 앞선 영화들보다 템포가 느렸다. 여기에 연속으로 세편의 영화를 보다 보니 이미 집중도는 심하게 떨어져 있었다. 눈과 귀는 영화를 향하고 있지만 다들 <춘향전>의 장면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윤용규의 <춘향전>을 한국에서 볼 수 있다면
폴란드에서 본 세편의 영화는 뻔하고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북한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크게 바꿔놓았다. 김정일이 북한영화를 직접 지도하기 이전 제작된 많은 수의 북한영화는 여전히 공개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한 자위단원의 운명>처럼 중요한 영화라고 언급된 영화도 해외 아카이브를 통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영화를 연구하는 것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일종의 보물찾기와 같다. 연구를 향해 가는 과정은 험난하지만 그 성과는 보물을 찾은 것 같은 보람도 있으니 말이다.
짧은 폴란드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헝가리를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 아름다운 부다페스트의 야경과 벌러톤호의 장관을 보았다. 들판 가득 흐드러지게 핀 라벤더 꽃의 향기도 맡았다. 이 모든 것이 폴란드에서 본 <춘향전>처럼 지금은 모두 신기루 같다. 내년에는 한국에서 윤용규의 <춘향전>을 볼 수 있도록 움직여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