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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여행자의 필요> 리뷰
이우빈 2024-04-25

이리스(이자벨 위페르)는 모자를 좋아한다. 항상 모자를 쓰고 다닌단다. 이리스는 막걸리를 좋아한다. 밥 먹을 때, 길을 걷다 쉴 때, 사람과 이야기할 때마다 늘 막걸리를 마신다. 여기까지 말하면 평범한 중년의 한국 사람이 떠오를 법하지만, 이리스는 프랑스에서 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프랑스에서 왔다”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는 도통 가늠할 수가 없다.

이야기는 크게 3개로 나뉜다. 영화가 시작하면 아무런 설정숏도 사전 정보도 없이 이리스와 이송(김승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송은 이리스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다. 학습의 방식은 특이하다. 이리스는 학습자가 지금 어떤 감정과 생각에 빠져 있는지를 집요하게 질문한 뒤에 그 답변을 프랑스어로 옮겨 적는다. 학습자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읽으며 공부한다. 둘은 산책에 나선다. 이송은 한 건물의 건립비 앞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억을 나눈다.

그리고 이리스는 원주(이혜영)와 해순(권해효)을 만나 다시 프랑스어 교습을 진행한 뒤 또 산책에 나서고, 이번엔 윤동주 시인의 시비 앞에 머무른다. 강의료를 챙긴 이리스는 유령처럼 빠르고 당혹스럽게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이리스는 젊은 남자 인국(하성국)에게 간다. 그의 집에서 함께 지내는 중인데 이 사실을 모르던 인국의 엄마(조윤희)가 찾아와 인국을 잔뜩 혼낸다. 하지만 인국은 지지 않고 밖으로 잠시 피난한 이리스를 찾아서 “집에 돌아가자”라고 말한다. 이리스는 “그게 우리 집이야?”라고 되묻고 인국은 당연하다고 답한다.

3개의 커다란 이야기 중간중간 이리스는 계속 막걸리를 마시고 새로운 사람들을 스치고 처음 본 한국어와 한국의 장소를 마주한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 사물, 자연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하여 발걸음을 옮긴다. 세상의 새 지평에 들어서고 많은 것을 보기에 도전한다. 말 그대로 견자(見者)의 삶. 이 속에서 이리스는 전혀 긴장하지 않고 성급하지 않으며 폭력적이지 않다. <다른나라에서>의 안느(이자벨 위페르)가 해변가의 펜션 주변에서 한국 남자들에게 노려지는 인물로 시작했다면, 이리스는 삶의 주도권을 줄곧 강력하게 쥐고 있다. 그가 정녕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긴 어렵지만 단 한 가지, 그가 무언가를 믿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껴진다.

기술적으로 꽤 발전한 듯한 홍상수 감독의 카메라는 영화의 편안한 분위기와 달리 무척이나 엄격하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적확하게 잘라낸다. 돌에 새겨진 이송의 아버지 이름은 작은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때로 개입하는 나무의 인서트숏은 은근히 초점이 나가 있어 형태가 흐려져 있고, 대화하는 인물들의 뒷모습이 잦은 탓에 그들의 얼굴을 보기 쉽지 않을 때도 있다. 결말에 이르러 인국은 이리스를 찾으려 산책로로 나서는데, 이리스와 똑같은 행색과 행위(피리 불기)를 하고 있는 한 사람의 뒷모습을 스르륵 지나가버리고 만다. ‘저 뒷모습의 앞면을 보고 싶다’라는 관객의 욕망이 강해질 그 무렵, 영화는 아주 갑자기 이리스의 커다란 모습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토록 커다란 이리스의 형체에서 관객은 어떤 진실을 알 수 있을까. 이리스가 모자와 막걸리를 좋아한단 것 이상의 진실이 있기는 할까. 어쩌면 이리스와 관객이 본 모든 것들조차 보이는 척 보이지 않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행자의 필요>는 영화라는 시청각적 여행길에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천천히 되묻는다. (아마)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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