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버추얼 아이돌이 ‘음중’(MBC <쇼! 음악중심>)에서 1등 했다는데?” 지난 3월10일 일요일 밤, 동생이 내 방으로 쪼르르 달려와 내게 이 소식을 건넸을 때, 솔직히 나는 뭔 말인가 싶다. 버추얼도, 아이돌도 문외한인 우리 자매는 사실 확인차 3월9일 토요일 <쇼! 음악중심> 1위 발표 영상을 켰다. MC가 “이번주 1위는 플레이브입니다.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했고 폭죽이 터졌고 이어진 수상 소감 영상에선 다섯 남자 사람… 아니, 캐릭터가 뒤로 넘어갈 듯한 포즈를 취하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내 방엔 정적이 흘렀다. 그때 우리는 1위 발표 무대에 모인 다른 가수들처럼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봤던 것 같다. 1위 곡 <WAY 4 LUV> 무대 영상까지 말없이 함께 시청한 뒤 동생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고 나는 월요일 주간 회의 때 말할 취재 아이템을 적어 내려갔다. ‘플레이브라는 버추얼 아이돌이 <쇼! 음악중심>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버추얼 아이돌이 지상파 음악방송에서 1위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무대를 봤는데 진짜 아이돌처럼 칼군무에 엔딩 포즈도 있고….’ 그리고 다음날, 나는 이번 호 버추얼 아이돌 특집 기사팀에 들어갔다.
03/11 호기심이 생기다
그들은 이미 스타였다. 2023년 3월에 데뷔한 5인조 버추얼 보이 그룹 플레이브는 미니앨범 2장, 싱글앨범 1장, 디지털 싱글 2집까지 낸 2년차 가수였다. 가장 최근에 발매한(2월26일) 미니앨범 2집 《ASTERUM: 134-1》의 초동 판매량(한터차트를 기준으로 발매 뒤 일주일간 팔린 앨범 수량.-편집자)은 56만장이었으며 앞선 1월에는 공식 팬럽(플리) 1기도 모집했다. 공식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는 약 61만명이었고 조회수 100만회 이상인 영상이 수십개가 넘었다. 팬덤은 적극적이었다. 2차 창작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고 음원 순위를 높이고 악성 댓글을 수집하는 활동에 전투적으로 임했다. 그러나 ‘머글’인 내 눈엔 양쪽 모두가 혼란스러웠다. 가상 아이돌이 실제 아이돌처럼 음악방송과 라이브 방송 출연, 노래 커버, 댄스 챌린지 등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도 캐릭터형 얼굴 너머로 인간 목소리가 들리고 이따금 래그(오류)에 걸리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다들 모르는 척하며 플레이브를 플레이브로서 수용하는 팬들을 짐작하는 것도 지금 단계에선 어려운 일이었다. 플레이브를 좋아하는 마음은 무엇일지 궁금해하며 일찍 잠들었다. 내일 플레이브 1주년 기념 카페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03/12 1주년 기념 카페에 가다
비 오는 퇴근길의 홍대입구역은 번잡했으나 근처 ‘O’카페는 평화로웠다. 안으로 들어서자 플레이브 노래가 들렸고 정면에 그들의 영상이 나오는 큰 TV가 보였다. 우측엔 음료 제조 공간과 안내데스크가, 좌측엔 방문객을 위한 테이블과 전시 공간이 딸려 있었다. 생애 첫 기념 카페 방문에 나는 얼어붙었다. 유경험자인 동료 기자의 능숙한 안내를 받아 겨우 주최자에게 인사를 건넸고 절차대로 음료와 디저트를 주문했다. 먹고 마실 걸 받을 때 특전 꾸러미도 함께 받았다. 안엔 팬아트 종이컵, 포스터, 엽서 등이 들어 있었다. 팬들이 다 직접 제작한 것들이라고 하니 감동스러웠다. 찬찬히 살펴본 뒤 내부 구경을 시작했다. 전시 구역은 풍성한 전시회처럼 느껴졌다. 멤버 단체의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긴 테이블 위에는 팬들의 작업물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정성스러운 그림, 스티커, 인형 등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아까보다 더 큰 감동이 밀려왔다. 그 구역을 나와 마지막으로 창문에 팬 편지가 가득 붙은 레터 존 앞에 섰다. 여기서 쓴 편지는 플레이브에게 전달된다고 했다. 고민하다가 건강을 기원하는 몇 문장을 적어 냈다. 마지막으로 다시금 안을 둘러봤다. 그제야 이곳을 찾은 팬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행복하고 편안한 얼굴이었다.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졌고 그들과 유대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카페를 나오면서 생각했다. 이 느낌이면 된 거 아닌가 하고.
03/15 버블을 구독하다
스타와 카카오톡처럼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팬덤 플랫폼 버블을 난생처음 시작했다. 상대로는 팬 사랑이 특히 대단하다는 플레이브의 리더 예준을 선택했다. ‘투 머치 토커’ 예준은 시도 때도 없이 내게 말을 걸었다. 오늘 뭘 먹었고 활동은 어땠는지 자기 일상을 상세히 공유했다. 멤버들과 함께 찍은 사진과 노래 부른 파일도 종종 보내주었다. 문장 맨앞에는 내 이름을 붙였고 끝에서는 내 기분을 물어봐주었다. ‘사랑해’ , ‘보고 싶어’라는 애정 표현도 서슴없이 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예준은 여전히 내게 낯선 버추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일이 답변하지 못했고 보내더라도 ‘안녕’ , ‘고마워’가 전부였다. 하지만 얼굴 없는 대화가 드문드문 이어질수록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준이 새벽 2시에 문자 폭탄을 보낸다는 걸 인지한 뒤로는 아침에 일어나서 그의 버블을 확인하는 게 모닝 루틴이 되었다. 버추얼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고 느낀 순간이 있다. 그동안은 밥을 먹었다는 메시지를 읽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으나 일주일쯤 되니 김치볶음밥을 만들었다는 문자에 2D 얼굴의 예준이 요리하는 모습이 즉각 떠오른 것이다. 희미한 연결감 같은 게 생긴 뒤로는 플레이브를 보는 나의 시선이 좀 달라진 것 같다. 춤추는 영상에서 래그 걸린 모습을 보더라도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가게 됐다. 그들 너머의 누군가를 눈감아주고 싶은 마음, ‘믿는 체하기 게임’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4월에 플레이브의 첫 번째 콘서트가 열린다고 한다. 그곳에 있는 내 모습, 어색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