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병원 원장님한테는 있는데 고민상(유해진)씨한테는 없는 게 뭘까요?” <도그데이즈>에서 반려견을 키우는 민서(윤여정)가 민상에게 건넨 말이다. 개의 복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던 민상은 질문을 곱씹으며 인간과 반려견이 같이 묵을 수 있는 리조트를 기획한다. 질문을 조금 바꿔 동물이 함께한 촬영장에 대입해보자. 동물 배우가 안전하게 촬영 가능한 현장엔 있고 그렇지 않은 현장엔 없는 것이 무엇일까? 2020년 동물권행동 카라(이하 카라)에서 ‘동물 출연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지 햇수로 4년이 지났다. 2022년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 낙마 장면을 위한 동물 학대로 말 ‘까미’가 사망한 뒤 KBS는 카라의 동물 촬영 가이드라인을 토대로 내부 가이드라인을 세웠고 정부는 2022년 상반기까지 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동물 촬영 현장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현장의 감독들과 동물 배우 섭외 및 훈련 전문가, 카라 활동가, 수의사에게 동물 촬영 현장의 현재와 당면 과제를 물었다.
스트레스는 적게, 사고 없이 안전하게 느리지만 변화해간다. 동물 배우의 처우를 염두에 두고 촬영한 사례를 통해 현장의 달라진 인식을 체감할 수 있었다. 윤성호 감독은 2021년 웨이브 오리지널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를 촬영할 당시 카라의 가이드라인을 참고해 “강아지 배우들이 보호자 입회하에 주어진 근로시간 동안, 위험하지 않은 환경에서 강아지가 섭취해도 되는 음식물만 먹으며 촬영에 임하게 했다”고 전했다. <전체관람가+: 숏버스터> 프로젝트에서도 거북이를 등장시키려 했으나 전문적인 보호자를 동행하기 어렵고 시장에서 구매해 촬영한 뒤 방생하는 수순이 일반적이란 것을 알고 등장 신 자체를 삭제했다. 옴니버스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에선 동물 촬영이 2건 진행됐다. 반려묘 국수를 <하리보>에 출연시킨김소형 감독은 “국수가 스트레스를 받을 게 우려돼 배우 신을 먼저 찍고 국수와 친한 촬영감독, 조감독만 대동해 국수 출영분을 따로 찍었다. 기다리다 원하는 국수의 행동이 나오면 그 신만 편집해 활용하고 일부는 배우들과 합성”했다. 최하나 감독 역시 <진정성 실전편>에서 반려견 두목이와 함께했다. “두목이가 현장에 대기하지 않고 보호자와 밖에서 산책하다 찍을 시간이 되면 촬영장에 오는 식으로 진행했다. 스탭들로 하여금 ‘여기!’를 외치며 시선을 유도하기보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좇고, 고속촬영을 해 편집 처리하기도 했다.” 현재 차기작을 찍고 있는 최하나 감독은 “개가 누워 있는 신을 촬영할 예정인데 다리를 잡고 억지로 눕히는 식으로 찍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그 대신 개가 최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방법을 고민 중”이라고 덧붙였다. 두 감독은 동물의 출연 시간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걸 강제적으로 연출하기보다 동물이 할 수 있는 퍼포먼스 안에서 찾는 게 낫고”(최하나), “비용이 들더라도 CG 처리를 하거나 더미를 제작하는 방법을 고려해봐야 한다”(김소형).
2020년 157명의 미디어 종사자를 상대로 카라가 설문조사를 진행했을 당시, “실제 동물 대신 CG로 연출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답변이 58%로 과반 이상이었다. 그러나 최근엔 CG를 활용한 신들을 전보다 자주 접할 수 있다. 주인공 해나(박규영)가 개로 변한 모습을 CG로 다수 작업한 드라마 <오늘도 사랑스럽개>가 대표적이다. 출연한 동물 배우의 섭외와 훈련, 연기 지도를 담당한 권순호 퍼펙트독 대표에 따르면 “장면마다 실제 개와 더미, CG 중 어떤 것을 출연시킬 것인지를 정하는 사전회의가 선행”됐으며 “디지털 캐릭터를 만들어 개가 표현할 수 없는 세부적인 표정 변화를 드러냈”다. <외계+인> 1부, 2부에 등장한 고양이 우왕이, 좌왕이도 CG가 실제 고양이를 대체한 사례다. 덱스터 스튜디오의 제갈승 VFX 슈퍼바이저는 “고양이의 특성상 통제가 안돼 모션 캡처는 불가했고 테스트 촬영 때 고양이 움직임 등을 촬영해 CG 결과물과 일일이 비교하면서 퀄리티를 높이는 작업 과정을 거쳤다”고 전했다. 권나미 활동가는 “CG가 실제 동물보다 리얼리티는 떨어지지만, 조사 결과 시청자들은 오히려 CG 작업된 동물과 더미가 등장했을 때 동물 학대를 의심할 필요 없이 안심하고 작품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촬영장에 동물 전문가를 대동하는 경우도 늘었다. 영화 <멍뭉이>에는 수많은 개들이 출연하는데 이들을 관리하는 출연자 모두 배우가 아닌 전문 훈련사 혹은 반려동물학과 학생들이었다. <오늘도 사랑스럽개>에는 여러 개들이 골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와 달려가는 신이 있다. 뛰는 도중 싸우거나 소형견이 밟히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권순호 대표는 개들의 덩치, 성향 등을 전부 고려해 섭외하고 촬영 3일 전부터 리허설을 진행했다. “예전에는 동물 배우와 훈련 전문가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았는데 이제는 제작 회의에서부터 훈련 전문가를 키스탭으로 참여시켜 동물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할 방법을 함께 논의한다.” 꾸준히 현장을 모니터링해온 권나미 활동가와 10년 넘게 동물 촬영 현장에 함께한 권순호 대표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스탭들이 늘고, 개별 연출자들의 동물 촬영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덕”이라며 입을 모았다.
법제화와 시스템 개선은 필수
하지만 연출자 개인의 역량에 기대는 현 상황은 동물 촬영 현장의 한계점을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권나미 활동가는 2022년 정부 발표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동물 촬영 가이드라인이나 관련 법제화가 실현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때문에 카라에서 동물 출연 미디어 모니터링 본부(이하 동모본)를 출범시켰다. 영화, 드라마를 본 시민들이 동물 학대가 의심되는 경우를 제보하면 카라가 제작사, 방송국에 공문을 보내 확인 과정을 거친다.” 1년 내 제보 사례 중 <마루이 비디오>는 굿을 위해 닭의 목에서 피를 뽑는 상황이 진짜 같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확인해보니 해당 장면에선 도살된 닭 시체를 사용했으나 닭목을 거칠게 잡아 올리는 장면에선 살아 있는 닭을 출연시켰다는 문제 상황이 파악됐다.” 그러나 법적 절차가 마련되지 않아 권고 조치 이상의 대응은 불가능했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동물 촬영 관련 문의가 들어오는 한편, 업체에 동물을 빌렸다 다시 소품처럼 보내는 경우도 여전히 흔하다.” 권나미 활동가는 지난해 미디어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에서 진행한 ‘미디어 속 동물의 재현’ 교육의 반응이 좋았다며 앞으로도 인식 개선을 위한 사전 교육을 시행할 방법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틱톡, 유튜브 등 1인 미디어의 동물 출연에 관한 가이드라인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설채현 수의사는 “자극적인 콘텐츠가 유행하고 있어 동물 학대가 자행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동물은 인간이 영상을 촬영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으니 이들이 도구화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설채현 수의사가 출연하는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시즌3>는 45분 정도 방송되지만 동물 복지를 고려해 틈틈이 쉬며 회당 10시간가량 촬영 중이다. 권나미 활동가는 “올해 안에 1인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새롭게 정리해 배포하고 댓글 켐페인을 진행하는 방안 등을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권순호 대표는 “영화, 드라마 현장에는 비전문가를 부르지 않지만 단건으로 촬영하는 광고 현장에는 중재해주는 전문가가 없어 정말 위험하다. 사고가 나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며 우려를 표했다. 개인의 인식 변화가 긍정적으로 감지된 촬영 현장에 법적 제재와 시스템적인 보완이 더해진다면, 동물 배우들이 훨씬 더 안전하고 즐겁게 촬영에 임하는 미래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