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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콜라] 빌 머레이와 백윤식, 연기에 곰삭은 삶이 배었다

기사를 쓰기 위해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 디브이디를 보고 난뒤 빌 머레이라는 배우에 대한 생각에 빠져 들었다. 알려져있다시피 그는 코미디언으로 배우생활을 시작했고 오랫동안 코미디 배우로 활동했다. 당연히 나도 빌 머레이하면 <고스트 바스터즈>의 괴상한 과학자나 <사랑의 블랙홀>에서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여자의 마음을 잡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남자를 떠올리며 그를 ‘웃기는’ 배우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빌 머레이

백윤식

빌 머레이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만든 건 2004년 개봉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였다. 나이 오십이 넘어 진지한 로맨스 영화에 처음으로 출연한 그는 전작에서 볼 수 없었던 매력을 품고 있었다. 아니 매력이라고 표현하기에는 2% 부족한 그 무엇이다. 안그래도 안좋던 피부는 더 쭈글쭈글해지고 아랫배마저 보기 좋지 않게 나왔으니 칠순의 나이에도 건장하고 핸섬한 숀 코너리가 보여주는 장년의 섹시함과는 거리가 있는 매력이었다. 그는 극중 역할로 보나 실제로 보나 세월의 파고가 남겨놓은 피로와 세상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는 ‘늙은 배우’였다. 세월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한탄하지 않고 무심하게 툭툭 던져놓는 웃음에는 씁쓰름한 비애가 느껴졌다. 그 비애는 당대의 톱배우들이 펼치는 명연기에서도 느끼기 힘든 독특한 감정으로 훌륭한 배우에게 세월이라는 더께가 쌓였을 때만이 만들어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보다는 코미디 정서에 가까운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에서도 그 분위기는 여전해서 황당하고 못된 짓을 할 때 무덤덤하면서도 복잡한, 이율배반적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면서 이상하게 가슴이 찡했다.

매우 다른 스타일의 배우지만 빌 머레이는 한국배우 백윤식과 여러모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같다. 빌 머레이보다 세살 위인 백윤식은 코미디 아닌 정통 드라마의 배우로 시작했지만 <서울의 달> 이후 근엄한 얼굴에서 나오는 황당한 대사와 행동을 통해 어느새 시청자를 웃기는 배우로 오랫동안 인식돼 왔다. 그랬던 그가 <지구를 지켜라>를 거쳐 <범죄의 재구성>에서 김선생으로 스크린에 당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백윤식이라는 배우를 다시 발견하는 경험을 했다. 애써 폼을 잡지 않으면서도 연륜으로 숙성된 김선생의 카리스마는 주인공 창혁을 압도할 만큼 묵직했고, “괜찮은 시추에이션이야”, “청진기 대보니까 딱 나온다” 같은 ‘양아치적’ 대사들마저 품격을 얻었다. 이 영화에서나 최고의 연기로 격찬받은 <그때 그사람들>에서나 그는 빌 머레이처럼 지나온 세월을 고스란히 몸에 흡수한 ‘늙은 배우’다. 두 배우의 연기는 웃기지만 소란스러운 웃음이 아니고 씁쓸하지만 인상구기는 우울함을 전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뜨거운 맥박이 팔딱팔딱 뛰는 젊은 배우들에게서 기대하기 힘든 중년배우의 매력이다.

아무래도 외모가 중요한 자산 가운데 하나인 배우에게 나이가 든다는 건 보통 사람들에게보다 훨씬 두려운 일일 게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멋있어지는 두 배우를 보노라면 늙어가는 것도 배우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는 것같아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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