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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속 나의 연인] <몽빠르나스의 등불> 제라르 필립
2005-03-08

사춘기 소녀 꿈 바꿔버린 ‘주말의 영화 그 남자’

제라르 필립

내 인생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 중에 중요한 한 남자가 있다. <적과 흑>의 주인공, 프랑스 배우 ‘제라르 필립’이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손가락이 가늘고 섬세했던 여자 미술 선생이 소질이 보인다며 내게 미대에 갈 것을 부추겼다. 덕분에 흥분해서, 거의 매일 미술실에 홀로 남아 늦도록 그림을 그리고, 풍광이 아름다워서 외롭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고 느끼게 했던 중학교 교정을 터벅터벅 걸어나오던 그 시절. 순수 미술을 하는 ‘화가’는 나의 꿈이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어느 봄날 토요일 밤, ‘주말의 명화’에서 제라르 필립을 만났다. 모두 잠든 안방에 숨어들어가, 17인치짜리 금성사 로고가 선명한 텔레비전을 어둠속에서 마주하고 영화 <몽빠르나스의 등불>을 보았다. 후기인상파의 한 사람이었던 모딜리아니의 삶을 다룬 전기영화였다. 고흐 이상으로 절대적 빈곤과 드라마틱한 삶을 요절로 마친, 그리고 사춘기 소녀를 단박에 사로잡을 미모의 화가 모딜리아니가 제라르 필립에 의해 내 앞에 나타났다.

내방 돌아와 꺽꺽대며 울었다, 물 한잔으로 와인흉내 내보며…

얇은 입술에 작은 얼굴, 검은 고수머리의 그는 내가 어렵게 구한 화집 따위에 엄지손톱만한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모딜리아니의 생, 그 너머를 보여주고 있었다. 혼자 무릎을 싸안고, 그 영화를 집어삼켜버린 나는 동생의 코 고는 소리가 낮게 깔리고 있는 내 방으로 돌아와 괜히 꺽꺽대며 울다가, 목젖을 움직이지도 않고 와인 한 잔을 아주아주 조용히 삼켰던 그를 떠올리며, 물 한잔으로 그를 흉내내어 보다가 잠이 들었다.

그 주말의 밤 이후, 내 꿈은 그림 그리는 사람에서 ‘영화 만드는 이’로 바뀌었다. 사춘기 소녀가 본, 빼어나게 잘 만든 한 편의 전기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가 그 어떤 것보다 매력적이라고 속삭여 주었던 것이다. 미술실을 드나드는 대신, 영화에 목매여 헤매던 내게 제라르 필립은 고맙게도 이후, 영화 속 애인들을 소개해 주는 구실까지 했다. 소녀의 ‘꿈’도 바꿔버린 그가 난생처음으로 ‘이성적 매력’의 세계까지 일깨워준 셈이었다. 학창 시절 내내 현실의 ‘이성 애인’은 사귀어 보지도 못한 내게 ‘몬티’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했던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의 몽고메리 클리프트처럼, 유사 제라르 필립 같은 배우, 이를테면 선병질적인 느낌의 얼굴에 우울한 표정, 다소 마른 몸으로 소녀적 취향에 어필하는 사람이 현실의 대체제였다.

사춘기가 지나고 열심히 주워섬긴 남자들은 취향이 바뀌어 ‘근육질(!)’이었다.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 <아메리칸 지골로>의 리처드 기어가 그 대표격. <브레드레스>에서 쫙 달라붙는 체크 무늬 바지에 튀어나온 엉덩이, 댄스하듯 흐느적거리는 불량한 걸음걸이의 리처드 기어는 가장 섹시한 이성이었다.

심재명/ MK픽처스 이사

<이유없는 반항>으로 호주에서 할리우드로 넘어가 <LA 컨피덴셜>로 스타가 된 러셀 크로가 그 뒤를 이었다. 대체로 좀 작은 눈에 촘촘한 속눈썹, 각진 턱의 얼굴에 두춤하고 넓은 어깨, 부피가 있어 보이는 몸집의 리처드 기어류의 배우들이 날 흥분시켰다. 최근엔 <오만과 편견>의 미스터 다시,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콜린 퍼스가 좋아졌다. 무뚝뚝하게 꽉 다문 입술에 다소 유연하지 못한 매너의 콜린 퍼스 덕분에 <셰익스피어 인 러브>도 다시 챙겨 보았다. 대체로 빼어난 연기력과 지적인 영혼의 소유자이거나 영화사에 오롯이 기록될 걸작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보다는, 내 취향으로 ‘섹시한 매력’이 풍기는 남자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영화 일을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새로이 스크린 속의 남자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이 어리석지만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서 그나마 위로가 되는 듯싶다. 한 소녀의 인생을 바꾸는데 톡톡히 한몫을 한 남자 ‘제라르 필립’으로부터 스크린 속 남성 편력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심재명/ MK픽처스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