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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청년, 전환기, 실천 - 한국영상자료원 창립 50주년 기념 국제 콘퍼런스 개최, ‘영화문화 운동의 역사화 작업과 필름 아카이브’
이우빈 사진 오계옥 2024-10-25

10월24일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이 창립 50주년 기념 국제 콘퍼런스 ‘영화문화 운동의 역사화 작업과 필름 아카이브’를 열어 한국·일본·대만·홍콩 4개국이 지나온 1980~1990년대 영화문화의 흐름을 조망했다. 4개국의 영화 아키비스트,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국의 사례를 발표하며 서로간의 연결고리를 찾고 역사화하는 자리였다. 정종화 영자원 학예연구팀장은 “1980~1990년대 동아시아 국가에서 펼쳐진 대안적 영화 보기 운동, 그 공간과 관객 문화, 이를 통해 성장한 각국의 영화계 인력, 그리고 영화잡지의 비평 담론과 뉴웨이브 형성 등의 흥미로운 관점”을 찾고자 했다는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김홍준 영자원 원장이 개최사를 통해 밝힌 당대 영화문화의 3가지 공통 키워드는 ‘청년, 전환기, 실천’이다. 4개국의 20세기 후반 영화문화를 이끈 이들은 “무모할 만큼 자국 영화와 영화문화를 고민했던 청년”이고 “영화를 단순한 교양이나 향유의 대상이 아닌 행동과 실천의 차원에서 고민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최근 영화산업에 AI, 스트리밍 플랫폼 등 새로운 고민의 대상이 찾아왔듯, 당시도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영화문화의 암중모색을 펼친 전환기”였다는 점도 살펴볼 수 있다. 김홍준 원장의 개최사 이후 펼쳐진 본격적인 연사들의 발표는 위 세개의 키워드를 아우르고 접합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청년: 90년대 영화 청년들의 유지를 잇는 영자원

콘퍼런스 토론 현장.

90년대 한국의 영화문화는 이른바 ‘영화 청년으로 불린 비디오테크 세대의 시네필이 주도한 실천적 운동으로서, 부산국제영화제나 시네마테크 문화 등 한국영화의 거대한 전환기를 불러냈다. 연사로 나선 채희숙 영화연구자는 이 역사의 흐름에서 ‘코아아트홀’의 사례를 집중 조명했다. 1989년 개관해 2004년에 문을 닫은 코아아트홀은 90년대에 비디오테크의 터를 닦은 ‘영화공간 1895’나 90년대 중반 한국 최초의 예술영화전용관으로 나선 ‘동숭시네마텍’, 서울아트시네마의 전신인 ‘문화학교 서울’ 등에 비해 보편적인 관객성을 더 중시한 공간이었다.

코아아트홀은 공간과 문화를 지지하는 관객의 지속적인 참여를 유도하며 ‘코아 문화’를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겼다. 당대의 시네마테크 활동을 병행하면서도 보다 넓은 관객층을 아우르려 했다. 이는 일본의 유래 깊은 미니시어터 ‘이와나미홀’을 모델로 삼은 결과였다. 이를테면 대학생 1, 2학년을 대상으로 모집한 관객 모니터 요원의 운영, <인어공주> 롱런 시사회, <일 포스티노> 재개봉 등 소수의 시네필뿐만 아니라 다수의 관객을 이끌어내는 전략을 펼치며 영화문화 전반의 부흥을 고심했다. 채희숙 영화연구자는 코아아트홀을 “아직 확고한 정체성을 갖지 않은, 유연한 개인의 욕망과 열정이 만나는 곳”이라고 정의하며 이처럼 영화문화의 시장 경쟁력을 고심한 사례가 “21세기 영화관과 영화 관객의 만남에서 산출되는 최근 영화문화”를 살피는 데 큰 참조가 될 것이라고 정리했다.

코아아트홀을 비롯해 각종 비디오테크, 시네마테크를 민간의 영화 청년이 주도하는 한편 영자원과 같은 공공 시네마테크는 90년대 이전까지 한국 영화문화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1990년 영자원(당시 한국필름보관소)이 서초동 예술의전당으로 거처를 옮기고 본격적인 상영관 환경을 갖추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이때부터 영자원은 해외로부터 정식 수급한 해외 고전영화를 상영하는 등 시네마테크 운동을 본격화했다. 정종화 팀장은 “1990년대 한국 영화문화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한 것은 큐레이션과 컬렉션 개념에 눈을 뜨고 영화적 지평을 넓히는 데 열정적이었던 당대 영화 청년들과 이들이 적극 활용할 수 있던 영자원이란 공공의 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1990년대 불었던 민간 영화문화의 폭발적인 부흥과 쇠락을 지나 현재 영자원이란 공공 시네마테크의 역할은 더욱더 중요해지고 있다.

전환기: 일본 미니시어터 문화의 근원과 부흥

개최사를 말하는 김홍준 영자원 원장.

이와나미홀과 같은 일본의 미니시어터 문화는 어떻게 발전해왔을까. 일본국립영화아카이브(NFAJ)의 도미타 미카 큐레이터는 1980년대 일본의 예술영화관 열풍을 이끈 세존 그룹의 역사를 돌아보며, 영화 애호가를 중심으로 영화문화가 어떻게 미니시어터 광풍을 벌일 수 있었는지 설명했다. <모래의 여자> <타인의 얼굴> 등을 연출한 데시가하라 히로시 감독이 주축이 된 시네클럽 ‘시네마 57’의 결성을 비롯해, 데시가하라 히로시 감독이 1961년에 창립한 소게쓰아트센터 등은 일본에 국내외 실험영화, 예술영화, 무성영화, 애니메이션을 폭넓게 소개했다. 그리고 1961년 일본의 3대 영화사 도호가 협력한 아트 시어터 길드(ATG)가 일본 각지에 9개 극장을 열어 영화 상영부터 비평, 제작에 걸친 전방위적 영화문화를 이끌어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교사형> <소년>이 이때 ATG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도미타 미카 큐레이터의 말처럼 “일본의 전통적인 스튜디오 시스템이 쇠퇴하던 전환기이자 1980년대 꽃을 피울 미니시어터 운동이 배태한 시점”이었다. 이후 1968년에 지어진 민간 극장 이와나미홀은 샤티야지트 레이, 루키노 비스콘티, 로베르토 로셀리니 등의 영화를 장기상영하며 일본식 미니시어터의 토대가 되었다.

1979년, 백화점과 유통업으로 유명했던 세존 그룹은 70년대에 이어진 일본 영화문화의 부흥에 발맞춰 도쿄 이케부쿠로 세이부백화점에 복합 예술공간이자 영화 상영관인 ‘스튜디오 200’을 개관했다. 스튜디오 200 이후 세존 그룹은 20~30개 내외의 극장을 운영할 정도로 영향력을 넓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스튜디오 200이 임권택, 이두용 감독과 안성기 배우 등 한국영화의 기수들을 초청하고 그들의 영화를 상영하며 한국영화를 본격적으로 일본에 들여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채경훈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은 토론 자리에서 “스튜디오 200이 한일 영화 교류의 시발점이 됐으며 이러한 사례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속도로 변화하며 지역, 문화, 민족, 언어 등 모든 경계를 초월하는 초연결 시대의 앞날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짚기도 했다.

세존 그룹의 극장을 비롯한 200석 이하의 단관 극장은 ATG와 비교되는 ‘미니시어터’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상영관 내 음식물 섭취 금지, 상영 시작 후 입장 불가, 멤버십 할인 제도’와 같이 후대에 널리 이어질 독립예술영화관 서비스의 토대를 닦았다. 이처럼 세존 그룹의 미니시어터 활동은 “영화의 전위성과 예술성을 일상에 풍요롭게 전하는 하나의 문화로서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는 창작자, 극장주, 비평가, 커뮤니티 시네마 활동가들의 지반” (도미타 미카)이 됐다. 다만 세존 그룹은 1990년대 일본 버블경제의 침체를 이기지 못하고 1998년에 완전히 영화 사업을 종료했다.

실천: ‘해적질’의 힘, 세기말 동아시아의 시네필 뉴웨이브

발표 중인 도미타 미카 일본국립영화아카이브 큐레이터.

로버트 첸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대만의 청년 시네필 문화는 한국과 비슷하게 ‘해적질’의 적극적인 실천이 이끌었다. 계엄령이 선포(1945~87)됐던 대만 정부의 문화 검열로 인해 대만에선 해외 영화를 감상하기가 어려웠고, 이에 타국의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보는 공간인 ‘MTV Parlor’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개인실에서 값싸게 영화 한편을 감상할 수 있는, 과거 한국의 DVD방이 떠오르는 형태다. 대만 시네필은 불법적인 루트로 수입한 해적판 비디오테이프를 MTV Parlor로 유통했고, 이로써 페데리코 펠리니나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등 동서양의 고전이 알려졌다. 이 과정엔 <하나 그리고 둘>의 에드워드 양 감독처럼 대만 뉴웨이브를 이끈 영화계 인사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작권 문제가 터지며 MTV Parlor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MTV Parlor가 대만 전역에 1천여개가 운영될 정도로 성행하자 할리우드가 상영료 문제를 들고 일어선 것이다. 1988년 미국 정부가 미국종합무역법에 한시적으로 도입한 ‘슈퍼 301조’ 조항으로 인해 불공정무역을 강제 중단하자 MTV Parlor는 완전히 쇠퇴했다. MTV Parlor는 민간이 공공의 시네마테크 역할을 대리했단 점에서 한국의 1990년대 비디오테크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한국의 경우보다 더 상업적이고 파편화됐으며 대중적인 성질을 가졌단 점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

즉 동아시아 전반의 20세기 후반 영화문화는 대개 청년들이 주도한 실천적이고 의식적인 전환기였다. 대만영화시청각센터(TFAI)의 하워드 양 프로그래머는 20세기 후반 대만 영화문화에 대해 예술가들이 주도한 영화잡지 <영화 계간>과 <영향>이 “서구의 영화이론, 작가주의 영화, 영화운동 등을 소개했고 이로써 영화인을 육성”해냈음을 설명했다. 한국의 20세기 후반처럼 대만의 영화문화 또한 민간 주도의 열풍으로 완성된 것이다. 현재의 상황도 비슷하다. 대만의 경우 비디오테크와 영화 청년들의 유산을 이어받은 영자원처럼 현재는 대만영화시청각센터가 영화제, 영화잡지 등 전방위적으로 영화문화를 수호하고 있다. 따라서 김홍준 원장의 말처럼 1980~90년대 동아시아의 영화문화 역사를 톺아보는 일은 “지금의 문제와 전혀 동떨어지지 않은” 동시적 고민이다. 영화의 역사는 언제나 모종의 실천을 계획하며 새로운 전환기를 도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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