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왜 IMF 외환위기를 되돌아볼까, 라는 의문이 무색하게 그간 한국 사회에서 드러난 재난 대처 상황과 흡사해 보이더라.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밤에 앉아서 시나리오를 읽는데, 처음엔 편히 기대 보다가 벌떡 일어나게 되더라. ‘헬조선’의 뿌리가 그때 다 생긴, 대한민국의 기반을 바꾼 굉장히 큰 기점이었는데 크게 체감하지 못하고 지난 거다. 나부터도 성인이었는데도 잘 몰랐다. 그런 안일한 대처가 어느 시기, 어느 정권의 문제일까. 너무 많은 사건을 겪어왔지만, 달라진 게 없었던 거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이 영화는 내가 하든 안 하든 반드시 만들어야 하고, 꼭 재밌게 만들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시현은 명분과 정의를 실행하고, 결정권자들에게 바른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여성 히어로라는 측면에서도 지켜보게 되는 캐릭터다.
=당시 금융 사회, 공무원 사회는 지금보다 더 보수적이고 숨막혔을 것 같다. 그런 가운데 신념과 소신이 일치하는 인물, 누구도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상황에서 발언하는 인물, 그리고 위기를 끝까지 막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인물, 한시현은 그런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인물에 남자가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그게 부자연스럽거나 애써서 한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한시현은 투사 같은 인물은 아니다. 자기 소신대로, 신념대로 끝까지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 영화의 제작자, PD가 여성이어서 굳이 여성으로 한 것도 아닌데 이런 것들이 굉장히 자연스러우면서도 의미 있게 만들어졌다는 점, 그 지점이 이 영화가 가지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소신 있고, 당당하고, 전문 영역에 능통한 한시현은 시나리오만 봐도 배우 김혜수가 연상된다. 김혜수가 가진 상징성과 이미지에 대한 요구가 부쩍 높아지는 시대다.
=활동을 오래 하다보니 어느 정도 드러나는 것도 있고, 최근 10년 동안 쌓인 캐릭터의 결과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김혜수’가 아니더라도 그런 열망을 수행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런데 그게 꼭 나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없다. 이 일을 하면서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게 주가 되지는 않는데, 마음이 외면할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럴 땐 다른 걸 고려하지 않게 된다. 물론 나는 연기가 직업인 사람이니 작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어필하고 파장을 주는 게 훨씬 유리하기도 하고, 그게 더 맞다고 생각한다.
-거침없는 첫 등장부터 걸음걸이, 외형, 말투 등, 한시현은 너무 전형적으로 그리지 않되 한편으로는 전형적으로 기대되는 지점도 효과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인물이다.
=전형적인, 상식적으로 예측 가능한 인물인데, 또 생각해보면 당시 실제 고위공무원 중에 한시현 같은 여성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스탭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협업했다. 대사량도 상당했는데 전문적인 경제용어로만 채워졌다. 제작진한테 “경제 뉴스를 봐도 이해를 잘 못하는 성인 기준으로 설명을 해달라”고 특별 요청을 했다. 그래서 전문가한테 수업을 들으면서 따라갔다. 특히 지금껏 대사나 발음에 대한 걱정을 한 적이 없는데 이번엔 발음이 안 되더라. (웃음) 매일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고, 보고서를 검토·작성하고,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는 사람인데 발음이 안되는 건 말이 안 됐다. 정말 시험 보기 전에 단어 외우듯이 익혔다. 그런건 결국 쉽게 가는 방법이 없는 것 같더라.
-30년 넘는 연기생활에, 또 한편의 필모그래피가 더해졌다. 기대와 함께 책임감도 커져간다.
=최근에 한 후배가 진지하게 묻더라. 주인공의 무게를 안고 책임감을 느낄 때 어떻게 하냐고. 답변을 해야 하는데, 솔직히 모르겠더라. 연기를 오래 했는데도 솔직히 잘 모르고 그냥 넘어간 것도 많았다. 늘 내 것 하기에 너무 바빴다. 내가 송강호, 조우진 배우처럼 연기를 어마어마하게 잘해서 후배들을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잖나. 이제 선배가 됐지만, 뾰족한 수는 없더라. 조금 아는 걸로 급급하게 연기하던 시절을 보냈고, 이제는 매번 긴장하면서 하고, 후배들이 더 잘하면 바짝 긴장하고 그런다. 연기 잘하는 사람들 보면 눈물 나도록 부럽기도 하다. 오래 해도 이렇게 하면 안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도 많이 한다. 진짜로. (웃음) 다만 엄살떨지 않는다. 당연히 내 몫은 받아들이고 계속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