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이 쏘아올린 작은 공
물론 ‘<리얼>급’이라는 표현이 흥행 성적에 미친 영향을 정확히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낙인 때문에 박스오피스에서 고전했다고 단언하기에는, 두 작품은 다른 이유로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리얼>급’이란 표현의 등장은 <리얼> 당시 인터넷에서 횡행했던 ‘못 만든, 혹은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 놀리기’ 문화를 이 작품에 적용해도 된다는 암묵적 합의가 된다. 멀게는 <클레멘타인>(2004) 때부터 존재했던 이 놀이는 작품 자체보다 작품에 대한 반응이 화제가 된다. 2014년 말 K모 이동통신사 GiGa Wifi 마케팅의 일환으로 <클레멘타인2>의 페이크 예고편을 만들 만큼 <클레멘타인>이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관객수는 6만명을 살짝 넘겼지만 “보지는 않았어도 이상한 영화임은 분명하기에 갖고 놀 수 있다”는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 바통을 2017년 <리얼>이 물려받았고, 그 계보는 <염력>과 <인랑>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영화를 본 사람도, 보지 않은 사람도 이 인터넷 밈(internet meme, 대개 모방의 형태로 인터넷을 통해, 사람에서 사람 사이에 전파되는 어떤 생각, 스타일, 행동 등을 말한다.-편집자)에 참여할 수 있다. “매너 좀 지킵시다. 영화 보면서 한숨을 쉬지 않나, 중간에 단체로 나가질 않나. 댁들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영화관에서 자는 사람 입장도 생각합시다.” “<리얼>은 피했는데 <염력>을 못 피하다니….”(이하 <염력> 네티즌 평) “잠들려고 하면 총소리 남.” “아, 팝콘 너무 맛있다. 팝콘에 집중이 되네.” (이하 <인랑> 네티즌 평) ‘네티즌 평점란’은 누가 영화를 놀리는 글을 가장 웃기게 써서 ‘추천 수’를 많이 받을 수 있는지 경쟁하는 고지전이 되고, 관심을 받은 글은 SNS에서 하루 만에 수십만~수백만명에게 뻗어나간다. 가령 “제목이 왜 <인랑>인지 알겠어요. 영화 보다 주위에 사람들이 죄다 인낭”이란 네티즌 한줄 평은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여러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와 단 하루 만에 총합 1만번 이상의 ‘좋아요’를 받았다. 그 이후 이슈가 넘어가는 플랫폼은 유튜브다. <염력>이나 <인랑>이 정말 <리얼>급인지 알아보겠다거나 영화의 흑역사를 칭하는 섬네일을 단 콘텐츠가 올라오면, 일주일도 되지 않아 수십만건의 조회 수를 올린다. <염력>과 <인랑>을 보지 않은 이들도 동참하는 이 놀이는 잠재적 관객 또한 이에 가담하거나, 상영관이 급감하는 2주차 이후가 되기도 전에 감상 자체를 포기하도록 부추긴다.
부채질하는 미디어, 담론은 어디로 갔나
문제는 ‘<리얼>급’이라는 표현이 보편화되면서 영화에 대한 진지한 반응은 사라지거나, 그나마도 “<리얼>급이다” , “<리얼>까지는 아니다”로 양분된다는 것이다. <리얼>이 개봉 당시 비웃음을 받은 것과 <염력> <인랑>이 아쉽다는 평을 받은 데는 그 이유부터 정도까지 현저하게 다르다. 애초에 비교 대상이 되기 힘든 영화를 설정하고, 그에 대한 우위를 논하는 것은 공연하다. 그러는 사이 <염력>이 용산참사를 다루는 태도가 윤리적으로 옳았는지, <인랑>이 집단과 개인의 갈등을 다루는 방식이 효과적이었는지에 대한 담론은 휩쓸려나간다. 하다못해 “지루하다”와 “지루하지는 않다”를 놓고 의견이 갈리는 양상 정도만 되어도 ‘<리얼>급’ 여부를 놓고 감상을 이분하는 상황보다야 생산적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리얼>급’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밈이 영화계에 치명적인 진짜 이유는 특정 작품의 흥행 실패 자체에 있지 않다. 영화 창작자들은 관객 반응을 모니터링하고, 이로부터 읽어낸 경향을 차기작에 어떻게 반영해야 할지 고민할 때 전보다 난항을 겪게 됐다. 무엇이 실패라는 결과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 그게 통제 가능한 변수인지 분석하기가 난감해진 것이다. 한 영화 제작자 A씨는 “대중의 입장에서 부족하게 보이는 영화가 나타나면 집단적으로 혐오나 분노의 발언을 하는 현상이 요즘 두드러진다. 영화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타깃이 되지 않게 영화 완성도부터 출연배우의 면면까지 총체적인 고민을 하게 됐다”고 전했다. <애나벨: 인형의 주인>(2017), <해피 데스데이>(2017), <곤지암>(2017) 등 공포영화에 대한 감상을 ‘웃기게’ 표현하고 소비하는 문화는 한동안 한국에서 암흑기를 맞이했던 호러물이 재전성기를 맞는 데 일조했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예상치 못한 이유로 하루 만에 빠르게 부정적 여론을 만든다. 여기에 미디어가 중심을 잡기는커녕 일조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한 영화 제작자는 “네티즌이야 어떤 워딩을 만들어서 놀릴 수 있다지만, 언론 매체는 그러면 안 된다. 미디어가 미디어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관객도 함께 전염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어떤 네티즌과 매체가 ‘재료’를 주면, 하루 만에 수십만, 수백만의 잠재적 소비자에게 뻗어나가고, 득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는 산업. 한국영화계는 지금 마케팅에 있어서 가장 난해한 시대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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