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영화는 아직도 발명중입니다. 우리는 그저 시작을 목격한 것에 불과하죠.” <씨네21>에 보낸 편지에서 빔 벤더스는 말했다. “디지털영화의 도래는 유성영화의 그것에 비할 만한 이행”이라고 그는 디지털을 편들었다. 영화에 소리가 도입될 때, 무성영화가 획득한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는 소리가 있었고 드디어 영화가 현실만큼 풍부해지리라고 반기는 선언도 있었는데.
민규동 감독이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촌에서 보내온 감동적인 보고서에서도 디지털은 중요한 단어다. 가볍고, 쓰기 쉬운 디지털카메라가 영화창작에 어떤 자유를 부여하는가를 디지털영화 <어둠 속의 댄서>의 감독은 이야기했고, <여고괴담2>의 감독은 공감했다. 디지털이 라스 폰 트리에게 100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면, 한국의 가난한 감독에게는 35mm 필름으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영화제작을 실현시켜주었다.
디지털은 또 영화유통산업에도 당연히 변화를 불러온다. 국내리포트에서는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새로운 논쟁을 전한다. 미국이 디지털 시대를 맞아 ‘영화를 포함한 지적 서비스 분야의 시장 개방’ 논리에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는 얘기다. 그걸 단순화하자면 이렇다. (영화후진국들은) 디지털 선진기술을 적극 도입해서 자국의 문화정체성을 향상시키는 데 써라, 필요하면 다른 분야에서는 무역자유화에 역행한다해서 금지되는 정부 보조금을 제공하는 것도 허용할 수 있다. 그런데 디지털 기술이 발달해서 영상물 상영기회가 많아지면 극장의 역할은 축소될 것이다. 환경이 이렇게 변화하는데 스크린쿼터 같은 제도로 극장을 사수할 필요가 있겠나?
한국과 유럽 등이 주장해온 ‘문화적 정체성’이란 개념을 수용했다는 것이 수정의 내용인데, 만일 미국이 그 정체성의 의미를 정말로 깨달았다면 보조금만으로 그 의미가 구현될 수 있겠는지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예상되는 충격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극장은 영화의 근거지로 남아 있을 테고, ‘보조금’으로 살려낸 영화들이 생명을 얻는 주요한 장이 될 테니까(사실, 새로운 전제를 달면서까지 스크린쿼터 폐지를 주장하는 것도 그래서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아직도 발명중인” 디지털영화에서 찾아야할 희망은 시장개방의 근거가 아니다. 창작의 새로운 자유거나, 민주적 소통의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