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장소는 해방촌에 있는 비자본주의적 학문공동체의 강의실이었다. 강의 첫날, 나는 퇴근 후 스마트폰이 안내하는 대로 집에서 10분쯤 걸어간 후 버스를 탔다. 평생 서울에서 살았지만 처음 가보는 동네였다. 15명 남짓의 학생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진보정당 당원도 있었고 고대언어 공부가 취미인 분도 있었다. 강의를 맡은 스님은 득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평생 일 안 하고 공부하려고 뒤늦게 출가를 했노라고 소탈하게 말했다. 그날 나는 이상한 정열에 이끌려 열심히 강의를 들었다. 집에 처박혀 있거나 지인들과 인사동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일 시간에, 낯선 공간에서 낯선 이들과 낯선 공부를 하고 있노라니 전혀 다른 종류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느낌이었다. 강의가 끝나자, 나는 다시 버스를 탔다. 무언가 가슴에서 희미한 느낌이 일어났다. 그 느낌은 전에 하지 않던 시도를 하고 있다는 뿌듯함 같기도 했고, 이 나이에 부질없는 일을 하는 자신에 대한 씁쓸한 비애 같기도 했다.
나는 집 근처 정류장에 내리려다 말고 두 정거장을 더 갔다. 밤에 배가 출출하면 간혹 들르는 멸치국숫집에 들어가서, 약수동 사거리의 뒤숭숭한 야경을 바라보며 국수를 먹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은 쉽게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이라는 구절을 배웠을 때부터 나는 어쩐지 내가 학문을 이루지 못하리라는 예감을 했다. 자신의 게으름과 한정된 재주를 잘 알았거나, 정작 중요한 것은 ‘생동하는 인생 자체를 잘 그리고 즐겁게 살아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무언가 이루기 위해서는 섬찟할 정도로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여야 한다는 것을 나도 어렴풋이 알았다. 하지만 나의 기질은 그런 극한에 자신을 던지는 것을 혐오했다. 두려워했다. 아니, 회피했다.
나는 예감한 바대로 학문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리저리 작은 교양을 도모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그리 슬프지는 않다. 나는 고통과 위험을 무릅씀으로써 넘볼 수 없는 위대함이나 감탄할 만한 견고함에 도달하기보다는, 감당할 수 있는 경로를 따라 알뜰한 행복을 찾기로 스스로 선택했다. 이 삶은 그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국수를 혼자 먹는 어느 날 밤에, “과연 내 길이 옳았을까” 하는 한 가닥 의문으로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일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새빨간 거짓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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