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댄서> O.S.T/ 유니버설 뮤직 발매
<어둠 속의 댄서>는 나약함과 강인함, 그리고 순진함(innocence)에 대한 영화이다. 또 현실이 어떻게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넘어서면서 비로소 굳건한 자기 자신이 되는지에 관한 영화다. 비욕은 “순진한 사람들은 꿈을 꾼다”(the innocents are
dreaming)고 노래한다. 그 꿈은 현실을 좀더 높은 곳으로 상승시켜 결국은 넘어서게(transcend) 한다. 영화에서 그 꿈의 기능을
하는 것은 바로 ‘음악’, 구체적으로는 ‘뮤지컬’이다.
광활한 미국 땅에서 펼쳐지는 이 영화의 미국에 대한 유럽인의 시선은 복합적이다. 미국은 셀마가 대대로 이어온 장님의 고통을 사라지게 할
꿈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셀마를 살인자로 만든 공간이기도 하다. 감독은 빌이라는 인물을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의 윤리를 보려 한다. 셀마가
살인한 뒤 나부끼는 성조기. 또한 감독은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통해 미국적인 문화가 가지는 힘을 보려 한다. 제프가 “왜 사람들이 갑자기
춤을 추고 노래를 시작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게 함으로써 아주 간단명료하게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정의된다. 그 공간은 셀마의 꿈을 대변한다.
셀마는 올드리치 노비라는 체코 출신의 뮤지컬를 아버지라고 꿈꾼다. 후반부의 법정 장면에서 증인으로 나온 그와 탭댄스를 추는 장면 역시 그
꿈의 연장이다.
이미 이야기한 바가 있지만, 음악은 당대의 소리의 조건들 속에서 나온다. 그래서 당대의 소음을 일정하게 반영한다. 바꾸어 말하면 음악은
당대의 소음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음악은 당대의 소음을 미학적으로 정리한 것일 뿐일 수도 있다. 베토벤이 교향곡에 금관악기를
사용한 것을 산업혁명 태동기의 소리의 조건과 최소한 완전히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는 없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미 베토벤 이후의 모든 음악은
많건 적건 ‘인더스트리얼’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더군다나 최근의 음악적 흐름 속에서는 소음과 음악의 분명한 경계가
없다. 고전적인 의미의 ‘악기’들은 이미 죽었다. 모터 소리도, 보일러 소리도, 그 모든 소음도 다 음악에 참여하여 음악적 요소들로 기능하고
있다. 이른바 ‘사운드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이제부터는 가장 중요한 음악적 개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음악이 갖는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도 있다. 영화에서는 근본적으로 음악과 효과음 사이의 경계가 그리 명확하지 않다. 그 모든 소리들이 ‘사운드’라는 영역
속에 한데 어우러져 기능하고 있다. 특히 <어둠 속의 댄서>는 이 대목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은 영화이다. 영화에는 모두 여섯편의 짧은 뮤지컬
신이 등장한다. 공장, 기차, 살인현장, 법정, 감옥의 독방, 형장으로 가는 복도 등 그 뮤지컬 신은 모두 현실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공장에서는 기계들의 소음이, 기차에서는 덜컹거리는 소리가, 살인현장에서는 빌이 켜놓은 턴테이블이, 법정에서는 현장을 그리는 삽화가들의
연필 소리가, 독방에서는 환풍구에서 들려오는 성가가, 형장으로 가는 계단에서는 발자국 소리가 음악을 유도한다. 그 소음들은 그대로 리듬이기도
하고 음악으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하다. 가장 구차하고 시끄럽고 별것 아닌 현실의 소리들을 꿈의 길목에 배치한 것이다. 비욕이 원래부터 채택하고
있던 두 요소, ‘인더스트리얼’적인 요소와 뮤지컬적인 요소가 그 대목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음악이 ‘비현실’은 아니다. 대신 그것은 현실의 좀더 깊은 소리이다. 그 ‘깊은 소리’의 차원에서 인간적인 선악은 무의미하다. 그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다 보인다. 비욕이 부르는 “모든 것을 다 보았네”(I’ve seen it all)라는 노래처럼 말이다. 그러한 인식
속에서 라스 폰 트리에의 깊이가 확인된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