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라 메> 일본 극장 입성 준비
삿포로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 걸려 도착한 유바리라는 작은 도시는 처음부터 영화적인 볼거리로 눈길을 잡아끌었다. 슈파로 호텔 사이로 난 좁은 도로엔 낮은 상점 건물들마다 온통 지금은 추억의 영화로 자리잡은 오래된 영화들의 그림 간판들이 걸려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찰리 채플린, 존 웨인, 마릴린 먼로, 알랭 들롱, 장 가뱅에서부터 일본의 미후네 도시로와 이시하라 유지로 등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옛 스타들이 지극히 고풍스런(?) 터치로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풍경만을 보고서 과연 이곳은 영화와 관련된 도시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이 거리를 조금 둘러보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유바리 키네마 거리(夕張キネマ街道)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에 아이러니하게도 시네마, 즉 영화관이라곤 도통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눈 속에 잠긴 이 도시의 지나친 고요함마저 떠올리면, 정말이지 이곳이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곳이 맞을까, 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기에 이른다.초행자의 이런 추측에 올해로 벌써 열두해째를 맞는 유바리 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실제로도 국제영화제라기엔 아주 소박하기만 한 자태로 응수해주었다. 예컨대, 정식 영화관이 아니라 문화스포츠센터나 호텔의 강당 같은 장소에 임시로 자리를 마련해 영화를 상영한다는 점이나 번듯한 영화제 데일리조차 발행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은 유바리영화제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여타 국제영화제들과 비교해도 규모면에서 크지 않은 수준임을 일러주었다.
북한영화 만났다
공식초청 부문, 영 판타스틱 경쟁 부문, 디지털 시어터 부문, 판타스틱 오프 시어터 부문, 판타스틱 비디오 페스티벌 등으로 짜여진 이 영화제의 프로그램 가운데에서 외형적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공식초청 부문일 터. 이 부문에서 선보인 17편의 영화들 가운데에는 한국 관객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판타스틱’ 영화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올해 영화제의 개막작인 <프루프 오브 라이프>와 폐막작인 을 비롯해, <나인 야드>와 <치킨 런> 등의 할리우드영화들이 이미 한국의 관객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했던 작품들인 것. 사미르 마흐말바프의 <칠판> 같은 경우도 부산영화제를 통해서 소수나마 한국 관객의 눈을 거쳐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공식초청 부문의 식단이란 게 일본 관객에게는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한국인이 봤을 땐 당연하게도 다채롭고 푸짐한 성찬(盛饌)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이 부문에서 특기할 것으로는 북한영화 <태권도 여인 소미>(1997)가 상영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소미라는 이름의 여주인공이 무예를 연마해 결국 부모와 스승의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북한판 무술영화는 <민족과 운명> <임꺽정> 등 북한에서 주로 시대극과 역사영화를 만들었던 장용복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최근 일본을 강타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열풍은 약 1만6천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는, 홋카이도의 이 아담한 도시라고 해서 그냥 비켜가진 않았다. 양윤호 감독의 ‘파이어 액션영화’ <리베라 메>가 공식 초청 부문에 초대돼 일본 관객에게 또 한번 한국영화에 대해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 이 영화의 상영장인 문화스포츠센터를 가득 메운 일본 관객은 영화의 흥미도 흥미려니와 무엇보다도 CG 도움없이 ‘불’을 연출해내는 솜씨에 놀라워하는 눈치들이었다. 유바리에서 보여준 <리베라 메>의 선전(善戰)은 이 영화가 일본 극장가에 공식적으로 입성하는 데에도 유리한 위치에 서게 해줄 전망이다. 제작사쪽에서는 일본 개봉까지 남은 기간 동안 영화의 드러나는 약점들을 보완할 것이라고 한다.
<다크 엔젤>,<버서스> 관심 끌어
유바리에서 선보인 할리우드영화들 가운데 아직 한국 관객에게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다크 엔젤>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는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이름이 주는 묵직한 중량감 때문에라도 관객의 관심을 끌어모은 영화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목 뒤에 굳이 ‘제임스 카메론이 만든’(Created by James Cameron)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이 영화 <다크 엔젤>은 실은 제임스 카메론이 ‘연출’한 것도, 또 그의 ‘영화’도 아닌 그런 작품이었다. 더 정확히 부연설명하자면, 그것은 카메론이 제작 총지휘와 공동각본을 맡아서 제작된 텔레비전 시리즈 <다크 엔젤>의 첫 에피소드였던 것이다. 영화는 미래의 2009년에서 시작한다. 어느 연구소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나고 양육된 12명의 아이들이 연구소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사살되고 단 한명만이 살아남는데, 그 생존자는 맥스라는 여자아이였다. 이제 영화는 10년 뒤, 그 본격적인 무대인 2019년으로 넘어온다. 보통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가졌고 또한 미모도 출중한 소녀 맥스는, 억압과 빈곤, 부패로 가득한 세계에서 정의로운 ‘검은 천사’로 자라난다. 2019년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유전자 조작의 모티브는 각각 <다크 엔젤>이 <블레이드 러너>와 <엑스맨>의 요소를 흡수·융합한 영화임을 일러준다. 그렇듯, 영화는 암울한 미래세계에 대한 풍경과 맥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자주 왔다갔다한다. 문제는 영화가 그 두 이슈 사이를 어정쩡하게 왕복하다가 정작 카메론적인 스펙터클조차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곧 다음 이야기가 뒤를 이을 테니 속단하기는 이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크 엔젤> 시리즈의 첫 편은 적당한 맛보기 정도로 끝나고 만다.아마도 이 영화제에서 가장 많을 수를 차지할 일본영화들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영화는, “네오 인디펜던트의 기수”라는 다소 모호한 말로 소개된 기타무라 류헤이 감독의 <버서스>(Versus)였다. 영 판타스틱 경쟁 부문에 초대된 이 영화는 정말이지 숨쉴 사이를 주지 않고 전개되는 영화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영화는, 아니 영화 속 인물들은 싸우고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그것도 그냥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피를 흠뻑 묻혀가면서 싸운다. 목이 잘리는 것은 예사이고, 몸통에 구멍이 뚫리는 잔인한 장면도 자주 나온다. 감독의 잔인무도한 재기가 돋보이긴 하지만 그 대신 영화는 전체적으로 호흡 고르기에 실패했다는 느낌도 준다. 2시간 정도의 러닝타임 내내 싸움만 반복되니 후반부로 갈수록 너무 길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하튼 <버서스>는 일본 인디펜던트 고어영화(이런 말이 있는지는 사실 잘 알 수 없다)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가끔씩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잘 참기만 한다면.
디지털, 전진 또 전진
0과 1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다른 많은 영화제들에서처럼 유바리영화제에서도 작으나마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디지털 시어터’(Digital Theater)라 명명된 이 부문은 영화와 디지털을 어떻게 연결해볼 수 있을까를 모색해보는 자리였다. 물론 디지털과 관련한 섹션이 올해 처음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에도 유바리에서는 ‘디지털 시네마 프리젠테이션’이란 부문을 통해 디지털의 현재를 조망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지난해 디지털 섹션이 주로 미완성 필름과 견본 필름들만을 그저 ‘전시’(Presentation)하는 데 그쳤다면, 올해 디지털 섹션은 그보다 조금 더 심화된 실험을 해보였다. 일본의 통신회사인 NTT의 기술 협조를 받아 도쿄에서 디지털 신호를 전송하고 그 신호를 받아 유바리에서 단편애니메이션들과 실사영화들을 보여주는, 새로운 상영방식을 선보였던 것이다.
올 유바리영화제에서 이 디지털 시어터 부문을 기획한 사타니 히데미(수플렉스 영화사의 프로듀서)는 영화에서 디지털을 본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며 앞으로 디지털을 열심히 알리는 작업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현재 이야기되는 디지털 논의와 관련해 아주 중요한 말을 던졌다. “현재는 디지털이라는 단어를 쫓는 데만 너무 급급하다. 하도 디지털, 디지털, 하고 소리만 시끄러우니 이건 마치 디지털에게 오히려 이용되는 것만 같다.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디지털을 아날로그와 어떻게 잘 이용할 것인가, 디지털을 왜 이용할 것인가를 잘 알고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테면, 무조건 제작비를 삭감하기 위해 디지털을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이 말을 듣고 그럼 당신은 디지털의 주요 목적이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며 상당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이야말로 솔직한 정답이 아니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디지털은 아직 우리가 모색하고 있는, 진행중인 무엇일 테니까 말이다.유바리 =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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