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만화 도매상에서 신간들을 둘러보다 깜짝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다. 아니, 이게 언제 적 작품인데 지금 번역되어 나왔지? 그중에는 <터치>나 <은하철도 999> 같은 고전적이면서도, 국내에 꽤나 명성을 얻고 있는 작품들도 있다. 하지만 <유한 클럽>이나 <에로이카의 사랑을 담아서>처럼 만화사적으로는 중요하지만 국내에서는 별달리 알려져 있지 않고, 그다지 인기를 얻을 가능성도 없어보이는 작품들을 접하면 솔직히 의아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만화사(漫畵史)의 빈곳을 채우려는 출판사의 의미있는 작업이라 여기면서 흐믓한 마음을 가져보려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작가의 인기에 편승해, 그 작가의 어설픈 초기 단편선에 불과한 작품들을 OOO 걸작선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펴내는 것을 보면 돌연 실망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원작의 인기에 편승해 후배작가가 그린 리메이크작을 마치 문제의 원작처럼 내놓는 경우도 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진짜 번역되어야 할, 독자들의 넓고 깊은 입맛을 맞춰줄 작품들은 아직도 한국어판의 자태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라는 강력한 뿌리에 어쩔 수 없이 얽혀 있는 우리 만화사의 줄기를 정확히 파악하고, 더욱 생생한 잎들을 펼쳐내기 위해서라도 이 작품들은 꼭 번역해주기 바란다.
너희가 호러를 아느냐?
우리 만화문화의 가장 빈곳 중 하나가 호러만화다. 워낙 소개된 만화가 없다보니 이토 준지의 작품이 일본 호러의 전부인 양 과대 포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호러의 참맛을 보려면 70년대 우메즈 가즈오의 작품들을 펼쳐야만 한다. 사실 이토 준지의 호러는 우메즈의 70년대에 대한 끊임없는 향수 속에 존재한다.
우메즈의 영향력은 거기에만 있지 않다. <마코토짱>은 괴팍한 악동들이 펼치는 개그 대소동의 선구적인 작품이고, <표류교실>은 세기말 신드롬의 중심에 존재하는 문제적 걸작이다. 다른 작품들이 시대적인 여건 때문에 번역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표류교실>만큼은 오늘날에도 그 의미를 계속 발산할 만큼 압도적인 작품으로, 꼭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완전히 파멸에 처한 미래의 땅으로 통째로 날아가버린 초등학교, 그 안에서 이기적인 선생들은 자멸해가고, 소년 소녀들이 약육강식의 전쟁을 벌이고, 그들만의 사회와 종교를 만들어간다. 동시대의 <데빌맨>(나가이 고)과 더불어 세기말에 대한 극한적인 상상력을 펼쳐낸 작품. <아키라>(오오토모 가쓰히로)와 <드래곤 헤드>(모치즈키 미네타로)의 전율적인 상상력도 결국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국내에 꽤나 여러 작품이 소개되고 있지만, 정서의 차이로 큰 반응을 얻지 못한 모치즈키 미네타로. 그래도 그의 비어 있는 한 작품, <좌부녀>(座敷女, 1993)만큼은 꼭 번역되었으면 한다. <물장구치는 금붕어>의 청춘 개그와 과감히 절연하고 호러의 깊은 계곡으로 침잠해 들어간 걸작 스토커 드라마. 평범한 대학생의 집에 찾아 들어온 한 여자의 서늘한 공격은 서서히 그를 파멸로 몰고 들어간다. 압도적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몬스터>(우라사와 나오키)의 초반부를 능가하는 섬뜩하기 그지없는 눈동자.
마쓰모토의 리얼리즘, 이노우에의 스타일
<핑퐁>으로 이미 국내의 만화가 지망생들에게 희망과 절망을 한꺼번에 안겨준 사나이, 마쓰모토 다이요. 오오토모 가쓰히로의 영화적 리얼리즘을 뛰어넘는 탁월한 그래피티 아트의 작품들은 하나하나 소장의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사실 무엇보다 그의 탁월함을 느끼게 해줄 작품은 <철근 콘크리트>이지만, 화려한 타이포그래피를 해치게 될지도 모를 섣부른 번역이 두렵기도 하고, 좀더 소박하게 그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화남>(花男)이 먼저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이언츠 야구 신화의 70년대를 잊지 못하는 시대 착오의 아버지와 시건방진 꼬마 아들의 풋풋한 만남. 마쓰모토의 최신작인 <고고 몬스터>도 그 단단한 자태를 한국어로 드러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그 화려한 장정 그대로.
마쓰모토와는 또다른 면모로 동시대의 일본 젊은이들을 흥분시키고 있는 주인공, 이노우에 산타. 그의 문제작들이 한번도 정식으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보인다. 하나는 그의 작품들이 스트리트 매거진 <분>(Boon)과 같은 비메이저 출판 계통에서 등장했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도시의 폭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과격한 표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강도의 범죄물들이 국내에서도 꽤나 출판되고 있는 가운데, 이 화려한 폭력의 스타일리스트를 우리 독자들이 못 만날 이유도 없다. <인인13> <도쿄 트라입(오리지널)> <본 투 다이>도 볼 만하지만, <도쿄 트라입2>가 오늘날 도쿄의 젊은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가장 리얼하게 보여줄 것이다. 컴퓨터그래픽을 과도하게 사용하고 데생과 화력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그 스타일 감각만큼은 높이 쳐줄 만하다. 서점에서보다 시부야의 음반매장 HMV에서 더 잘 팔리는 만화.진짜, 어른 여자들의 만화
90년대 일본 여성만화의 최대 성과라 불리는 <해피 마니아> <젤리 인 더 메리 고 라운드>의 안노 모요코조차 아직 국내에서 확실한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레이디스 코믹스의 걸작들을 소개해달라고 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일일지 모르겠다. 사실 80년대 레이디스 코믹스의 한축을 형성한 사쿠라자와 에리카조차 소리소문없이 나타났다 사라졌지 않은가? 그러니 아무리 우리 여성 독자들의 연령층이 높아졌다고 해도, ‘성인 여성만화’가 자기 자리를 잡기엔 역부족이라고 지레 포기하는 것이 맞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레이디스 코믹스계의 <짱구는 못 말려>에 불과한 <미녀는 괴로워>가 판을 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다고 여겨지니, 정말이지 오카자키의 교코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80년대 후반 미소년 동성애의 꽃놀이판에 경쾌하면서도 솔직한 사랑과 섹스이야기를 던져버린, 진짜 어른 여자들의 만화 <입술부터 산탄총> <제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도 좋다. 그러나 발랄한 연애의 밑바닥에 있는 청춘의 그림자를 묘사해낸 문제작, 죽음에 대한 가벼운 듯 서늘한 사색의 어조로 인해, 문학평론가들로부터도 질투를 받아온 <리버스 에지>라면 더욱 좋다. 사실 그녀를 보지 않는다면, 진짜 안노 모요코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도 많다. 왜 이 작품은 말하지 않았냐고, 항의의 메일을 보낼 일본 만화광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나 스스로도 정말 보여주고픈, 쓰게 요시하루와 일본 언더그라운드 만화의 꽃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작품 정도라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으면서 일본만화의 진정한 힘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작품부터 이야기했다. 당대의 작품을 더욱 재미있게 보기 위해서도, 그보다 뛰어난 우리 만화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 고리들부터 채워나갔으면 좋겠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