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아카데미 25주년을 기념해 열린 아주담담 ‘2009년 화제의 중심에 선 영화인들’이 13일 오후 4시 피프센터 QOOK TV 관객 라운지에서 열렸다. 첫 연출작 <경>으로 부산을 찾은 영화 아카데미 1기생인 김정(김소영) 감독, 11기생인 봉준호 감독, 13기생인 민규동 감독 그리고 <해운대>의 프로듀서이자 현재 영화 아카데미 프로듀서 과정의 책임 교수인 이지승 프로듀서가 참석했다. <씨네21> 주성철 기자의 사회로 진행된 아주담담 행사를 지면 생중계한다.
사회자: 아카데미 초창기 분위기는 어땠나.
김정: 졸업식날 졸업장을 받는데 남자 동기들은 연출 전공으로, 나와 유지나씨는 시나리오 전공으로 표시되어 있더라. 여자가 무슨 연출을 하냐는 거였지. 여자가 카메라 만지면 재수 없다고 카메라에 손 못 대게 한 적도 있다.
봉준호: 1994년도에 입학했는데 지금과 달리 1년 과정이었다. 가장 육체를 혹사하며 보낸 때가 아닌가 싶다. 즐거운 혹사였다. 몸무게가 78kg였으니 살면서 가장 가벼웠던 때기도 하고.
민규동: 26살에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처음 영화를 배웠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보여준 영화중에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도 있었다. 또래이기도 해서 자극이 됐다. 봉준호 감독의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 살피다가 영화아카데미를 알게 됐다. 아카데미는 내가 다닐 때부터 2년제로 바뀌었다. 2년 내내 영화 만드는 것 이외에 다른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사회자: 이지승 피디의 경우 아카데미 출신은 아니지만 그 시기 영화를 공부하면서 아카데미 진학을 한번쯤 고려해봤을 것도 같은데.
이지승: 한양대 영화과 연출 전공이었는데 당시 아카데미는 영화를 하려고 하는 이들에겐 상위의 교육기관이었다. 확실히 영화과 출신과 아카데미 출신들 사이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영화과 졸업생들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본인이 전지전능하게 모든 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영화과 출신 감독들, 아카데미 출신들은 모르면 모른다고 빨리 말한다. 그런 게 교육상 서로에게 도움 되는 것 같다. 사회자: 김정 감독에게 묻고 싶은데 극영화로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뭔가?
김정: 시나리오를 쓰던 때의 일이다. 조감독이 전화해서 내 시나리오를 다른 사람 이름으로 발표하기로 결정했다더라. 그러면서 감독이 ‘원고지료’를 주라고 했단다. 원고료도 아니고. 심하게 모욕감을 느껴서 충무로에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뉴욕에서 공부했고 돌아와서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을 만들었다. 하지만 영화 만드는 건 영원한 내 첫사랑이었다.
사회자: 민규동 감독을 보면 인문학적 감수성도 풍부하고 소년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민규동: 대학 때 별명이 신림동 황금허리였다. 내가 허리를 튕기면 200명 정도가 쓰러졌다. 대학 와서 구로공단 파업 현장에 사람들 응원하러 갔다가 말로만 하는 응원은 진짜 응원이 아니라는 느낌에 앞에 나가 춤을 췄다. 앙코르를 세 번 받고 반응에 감동 받아서 이후 광대처럼 생활했다. 그 에너지로 영화에 발을 내딛었다. 첫 단편을 만들고는 병원에 다녔다. 잠도 못 자고, 처음으로 싫어하는 사람도 생기고. 경험하지 못했던 갈등을 겪었다. 많은 영화가 행복, 구원, 용서, 화해를 얘기하는데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선 행복과 구원은 없고 갈등과 싸움만 있었다. 어떻게 내용과 일치하는 과정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2년 내내 영화가 안겨준 근원적 고민을 뼈저리게 했다.
사회자: 관객 질문을 받겠다.
관객: 영화 속에 생생히 담긴 살아있는 이야기들은 단순히 리서치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거 같은데 어떻게 이야기를 채워나가나.
봉준호: 타인의 삶을 묘사한다는 건 어렵다. <플란다스의 개> 시나리오 쓸 때는 여상 졸업하고 경리직하는 여성을 만났고 <괴물> 때는 한강 매점 아저씨랑 술을 마셨다. 그럴 때마다 더욱 모르겠다. 창작하는 사람의 짐이자 의무인 거 같다. 미지의 세계를 어떻게든 묘사해야 하는데, 최후의 순간 기댈 수 있는 건 우리의 상상력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