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장커 감독의 마스터클래스 강연이 13일 오후 4시, 그랜드호텔에서 열렸다. 그는 음악과 춤, 시에 빠졌던 어린 시절부터 북경영화학교를 다녔던 20대의 자신과 첫 작품인 <소무>를 만들게 됐을 때까지의 사연을 풍부한 에피소드를 곁들여 이야기했다. 지면관계상 많은 이야기를 담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나는 부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펀양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바다도 없고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라 즐길 거리가 없었다. 가끔 영화를 보긴 했지만, 영화감독을 꿈꿔 본 적은 없다. 다만 나름의 표현수단을 항상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유랑자>란 인도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좋아했는데, 용돈을 모아 하모니카를 사서 그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내가 가진 최초의 표현도구가 그 하모니카였던 셈이다. 이후 1984년에는 많은 학생들이 기타를 치며 자신의 마음을 노래했는데, 그때는 나 또한 기타에 심취했었다. 중학교를 다닐 때는 심지어 춤도 추었다.(웃음) 흑인들이 춤 대결을 하는 영화들이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춤 다음으로 해본 건 시를 쓰는 일이었다. 하루에도 20편 이상의 시를 쓸 정도로 빠졌었다.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낸 후, 미대에 들어갔다. 왜 미술을 했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 데, 수학을 너무 못했기 때문이었다.(웃음) 아버님도 미술을 하면 수학을 할 필요가 없으니 미대에 가라고 하셨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그림만 그리지는 않았다. 낮에는 그림을 그렸고, 밤에는 소설을 썼다. 같은 생활을 반복하면서 처음으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했다. 나는 내가 살면서 겪은 일들, 느낀 감정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때 만난 게 첸 카이거 감독의 <황토지>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다. 그 영화는 내 고향의 이야기와 다름없었다. 내 고향의 황토지가, 마을이 영화에 나타나고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풍경도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황토지>에는 지금 내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로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담겨있다. 첫 번째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공간이다. 어느 공간이 가진 생각과 감정을 영화에 담아야 한다는 거다. 세 번째는 시간이다. 사람의 운명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고 시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사람을 그리는 영화에서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황토지>를 본 후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삼수 끝에 북경영화학교에 들어갔다. 연출이 아니라 이론과에 들어갔는데, 그 이유는 이론과를 지원하는 학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웃음) 매년 떨어져보니, 일단 들어가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곳에서 나를 이끌어 준 결정적인 영화는 허우샤오시엔의 <펑꾸이에서 온 소년>이었다. 대만의 이야기지만, 그건 중국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때 친구들과 만든 영화가 <샤오샹의 귀가>란 단편이다. 기숙사에서 시사를 했는데, 15분 만에 관객들이 다 사라졌다.(웃음) 친구들은 이 영화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자고 했다. 나는 워낙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테이프를 들고 온갖 대학들을 돌아다니며 상영했다. 그 과정에서 이 영화에 대해 또 다른 평가를 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감을 회복했다. 게다가 홍콩의 어느 신생 제작사를 알게 돼 그곳에서 <소무>를 찍을 수 있었다. 나는 여러분에게 ‘영화는 무조건 완성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욕먹는 것에 지쳐도 무조건 완성시켜라. 그리고 관객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라. 당신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 몰랐던 걸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다음 작품에 대한 자신감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