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영화는 지금 새로운 변화의 물결 속에 있다. 80년대 소위 5세대영화가 미학의 반란을 꾀했다면, 90년대 중국영화는 또다른 세대의 등장과 더불어 영화산업 격변기의 와중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올해가 중국영화산업의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바로 중국이 WTO 가입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WTO에 가입한 이후에 영화산업이 어떻게 변할지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점진적이나마 개방의 길로 나아가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중국 정부가 외화시장 개방과 해외투자 유치 등과 같은 개방적인 정책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중국영화산업을 지탱해왔던 스튜디오 시스템은 이미 90년대 초부터 와해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그 시발점은 70년대부터 시작된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이었다. 국영 스튜디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점차 줄어들었고 스튜디오들은 새로운 생존전략을 짜야만 했다. 이를테면 시안스튜디오의 경우 1988년까지 매년 10편 정도의 영화를 제작하였으나, 98년에는 5편으로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시안스튜디오가 택한 생존전략은 TV드라마나 뮤직비디오 제작, 외국회사나 독립영화사와의 합작을 늘리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스튜디오 시스템의 와해 속에서 영화제작방식도 다양한 방식으로 분화해 나갔다. 우선 국가의 지원을 받아 선전영화를 만들거나, 첸카이거나 장이모처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성을 바탕으로 해외자본을 유치해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있다. 문제는 정부차원에서 새롭고 젊은 영화인들을 수용할 수 있는 폭이 좁아졌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젊은 영화인들은 스스로 제작비를 조달하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독립영화인과 독립영화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일단의 젊은 영화인 그룹을 ‘6세대’로 묶어버리거나, 그들이 모두 예술영화를 지향한다는 오해가 생겨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젊은 영화인 그룹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철저하게 상업영화를 지향하는 그룹이고, 또 하나는 예술영화를 지향하는 그룹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감독으로는 펭샤오강을 들 수 있고, 후자는 장위엔, 지아장케, 왕샤오슈아이, 그리고 로우예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도 ‘6세대’로 묶어버릴 공통점은 거의 없다. 그들은 각기 너무나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개방을 앞두고 있는 중국영화계는 이제 영화의 성패가 정부의 정책이 아닌, 관객의 기호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에 이들 젊은 영화인들이 가장 잘 적응할 것으로 전망된다. 펭샤오강은 이미 상업영화의 확실한 강자로 자리잡았고, 후자의 감독들은 제작비를 조달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우예는 이들 가운데서도 좀 특별하다. 그는 상하이에서 태어나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는, 말하자면 순수 토종 상하이 독립영화인이다. 물론 상하이가 유구한 영화산업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전통적인 상하이영화산업과도 거리가 멀다(지금 상하이에서는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독립영화사인 로우예의 드림 팩토리와 미국인 피터 로가 세운 이마르필름이 새로운 독립영화의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흔히 다른 독립영화감독들이 그랬듯이 로우예도 제작비를 조달하기 위해 영화 외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데뷔작 <주말연인>(1994)을 만든 이후 TV시리즈물인 <슈퍼시티>의 제작을 맡게 되었다. 로우예는 자신의 독립영화사 드림 팩토리를 만들고, 모두 10편으로 기획된 이 시리즈물의 연출을 베이징영화학교 출신의 동료와 독립영화인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였다. <슈퍼시티> 프로젝트는 애초 계획과 달리 5편으로 끝났지만, 그해 로우예는 <슈퍼시티>를 통해 선보일까 한때 검토하기도 한 <수쥬>의 제작기회를 만났다. 그의 데뷔작 <주말연인>을 눈여겨보았던 독일의 제작자 필립 보베르가 PPP 참가작 <패션게임>를 검토하던 중, 제작 중단상태에 있던 <수쥬>에 먼저 추가투자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수쥬>는 2000년에 발표된 중국영화 가운데 비평과 상업 양면으로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 되었다. 29회 로테르담영화제 타이거상 수상을 시작으로 파리영화제 대상, 비엔나영화제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 제1회 도쿄 필름엑스 대상 수상 등 화려한 수상실적을 쌓아갔고, 지난 한해 동안 가장 해외 판매실적이 뛰어난 중국영화가 되었다.
말하자면 <수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두루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인데, 기묘하게도 서양의 평론가나 관객은 <수쥬>를 보면서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을 떠올리고, 동양의 평론가나 관객은 왕가위를 떠올린다. 필자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제1회 도쿄 필름엑스에서도 5명의 심사위원 중 4명이 <수쥬>를 대상후보로 선택했다. 나머지 한명인 아르투로 립스테인 감독의 반대이유는 우습게도 ‘신인치고는 영화를 너무 잘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잘 짜여진 이야기 구조는 물론이거니와 1인칭 시점의 서술구조라는 독특함, 광고영화를 연상시키는 유려한 핸드헬드 카메라 등, 확실히 <수쥬>는 여타 중국영화와는 다르다. 특히 장이모나 첸카이거 등과 같은 선배세대의 영화와 독립영화세대가 지향하는 바가 확연히 구분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록 스타일은 감각적이지만 과거의 역사보다는 동시대의 이야기를 선호한다는 점에서는 여타 독립영화작가들과 일정부분 지향점이 겹치기도 한다.
필자가 <수쥬>를 통해서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대중성과 예술성, 중국적이면서도 세계인의 보편적인 정서를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제작자로서의 자질이 뛰어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는 기민함도 있어 보인다. 실제로 그는 인터넷을 통한 영화제작과 상영방식에도 눈길을 돌리고 있다. <수쥬>를 제작할 당시에는 음악을 담당한 독일의 요르그 램버그와 매일 자신이 찍은 필름의 비디오클립과 새로 작곡한 음악을 이메일로 서로 주고받으면서 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즉 로우예는 작가로서의 재능 외에도 독립영화제작의 새로운 모델을 끊임없이 모색한다는 점에서, 넓게는 중국영화의 미래의 한축을 만들어 나가고 있기도 한 셈이다.
그는 지난해 <수쥬>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고, 아울러 신작 프로젝트인 <여름궁전>이 PPP에도 초청되어 22편의 프로젝트 가운데 대상에 해당하는 부산상(釜山賞)을 수상하면서 재능과 미래를 인정받았다. 이제 그에게는 자신의 재능과 미래를 확실하게 펼쳐보이는 일만 남은 것이다.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