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빰~빰빠밤~” 브라스 소리와 함께 빠르게 걸어가는 도시인들. 거리를 비추던 카메라는 미끄러지듯이 내려와서 거리 오른편의 양품점 쇼윈도를 응시한다. “이 벳드 퍼품이란 뭐죠?” “잠자코 어서 돈이나 치르세요!” 물건을 사려던 한 사내의 질문에 옆에 있던 부인이 무안을 준다. “침대에 뿌리는 향수입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교양 있는 용모의 오선영(김정림)이 대답한다. 돈을 내고 나서는 손님들과 그들이 나간 문틈으로 밀려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그리고 여전히 쇼윈도 밖에서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 사람들의 모습. 정비석 원작소설을 영화화하여 당대최고의 히트작으로 자리 잡은 <자유부인>의 한 장면이다. 흑백 필름의 은빛 질감 너머로 보이는 1950년대 서울의 모습은 이렇게 반세기 뒤 관객들을 묘한 매혹 속으로 인도한다. 그 매혹의 실체는 어쩌면 50년 묵은 필름 자체가 풍겨내는 고급스러운 향내일 수도 있겠고, 또 어쩌면 한형모라는 걸출한 대중영화 감독이 절묘하게 포착해낸 그 시대의 공기랄 수도 있을 것이다.
대도시의 삶, 여성들의 욕망에 관심 많아_한형모 회고전
한가한 토요일 오후, 휴진을 맞은 어느 의원의 ‘닥터 김’은 단짝 친구와 외출 나설 채비를 한다. 뒷정리를 당부하는 닥터에게 세 명의 간호사 중 한 명이 묻는다. “선생님, 저희들과의 약속은?” “오호라, 깜빡 잊었네. 홍선생, 내가 좋은 것을 보여드릴게 잠깐만.” 닥터 김은 병원 한켠에 걸려있던 기타를 들고 연주를 시작한다. “우~리들은 유쾌한~ 백의의 천사~ 명랑한 백의천~사 노래 부르자~ 오늘은 토요일~ 즐거운 토요일~ 슬픔도 눈물도 다 버리고~.” 작곡가 박시춘과 가수 김시스터즈의 절묘한 앙상블. 한국전쟁이 끝난 지 고작 3년이 지난 1956년의 부산을 담은 <청춘쌍곡선>은 이처럼 유쾌한 뮤지컬 양식으로 시작하는 로맨틱 코미디다. “거의 영화 이전(以前)적인 유치한 작품”(한국일보 1958.3.7)이라는 악평을 받아야 했지만 높은 흥행성적으로 대중들에게는 지지를 받았다. 당시 평단의 입맛은 차치하고 지금에 와서 보면 이 작품은 대중정서를 읽는 한형모 감독의 뛰어난 감각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각기 많이 먹어서, 또 못 먹어서 배탈이 난 두 친구의 생활환경을 바꿔치기 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는 당시 관객들이 피부로 느꼈을 빈부격차, 계급격차를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형모는 늘 이런 식이다. 직설적이라면 직설적일 수 있을 사회적 이슈들을 코미디 혹은 멜로, 혹은 스릴러와 같은 장르의 문법 속에 절묘하게 녹여내면서 대중영화로 완성해낸다. <자유부인>의 바람난 대학교수 부인 이야기나 <청춘쌍곡선>이 보여주는 뚜렷한 계급격차는 한형모이기에 가능한 매끄럽고 세련된 방식으로 대중정서를 자극했다. 여기에 더해 최인규 감독 밑에서 촬영감독을 했던 이력은 그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우아한 카메라워크와 고급스러운 미장센을 설명해준다.
<자유부인>이나 <청춘쌍곡선>에서도 보았듯 한형모는 대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리듬감을 주며 담아낸 도시인들의 출퇴근 장면이나 빠르게 흘러가는 자동차 행렬 등은 그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돼지꿈>은 그런 관심사를 가장 직설적으로 보인 작품이다. 마치 문화영화를 연상케 하는 기록적인 영상들과 내레이션으로 인구 200만의 수도 서울을 소개하며 시작하는 이 작품은, 순진하고 고지식한 교사 부부가 몰락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후반부의 급박한 전개로 인해 어안이 벙벙하다면 시작 부분의 내레이션을 떠올려보자.
대중감각이 뛰어난 감독 한형모는 또한 여성들의 욕망을 영화적 소재로 끌어오는 데 귀재였다. 양품점에서 일하며 젊은 청년과 바람을 피우는 대학교수 부인을 담은 <자유부인>이 그런 소재를 가장 센세이셔널하게 포착한 작품이라면, <여사장>과 <언니는 말괄량이>는 여성의 사회진출과 성 역할이라는 세밀한 주제로까지 파고들어간 작품들. 조미령이 잡지사 여사장 요안나로 출연한 <여사장>은 부리는 여성과 부림을 당하는 남성이라는 전도된 사회적 지위를 통해 전쟁 이후 터져 나왔던 여성의 사회진출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언니는 말괄량이>의 ‘안 순한’ 유안순애(문정숙)는 뛰어난 유도 실력으로 어지간한 남자들은 바닥에 내던질 수 있는 ‘남성적’ 캐릭터. 시대적 한계 때문에 역시나 귀결은 무척 보수적이지만, 두 작품이 소재로 삼은 여성들의 모습이 그 시대 여성관객들의 욕망 속에서 나온 것임은 이 영화들을 그저 보수적 텍스트로 볼 수 없게 만드는 사실이다.
이 밖에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이자 은밀하게 대남 작전을 수행하는 ‘여간첩’ 마가렛(윤인자)을 담은 <운명의 손>, 대담하게 애정을 표현하는 ‘아프레걸’ 인순(김의향)의 사랑 앞에 희생당하고 마는 한 우직한 사내 문선(성소민)의 이야기 <순애보> 등 통속적 이야기 속에서 누구보다 일찍 동시대의 욕망을 풀어냈던 한형모의 영화 일곱 편이 이번 영화제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1960~70년대 감독들에 가리어 그 진가를 쉬이 알 수 없었던 이 시대감각의 귀재를 이렇게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처음이 될 것이다.
故김기영 감독의 10주기를 추모하다_한국영화의 고고학
한편 “한국영화의 고고학”이라 이름 붙여진 섹션에서 선보이는 두 편의 작품 <하녀>와 <반금련>은 故김기영 감독의 10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고고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도 이 두 작품은 각기 사연을 안고 여기에 왔다. 한국영상자료원과 세계영화재단(회장 마틴 스콜세지)이 함께 복원한 <하녀>는 오랜 기간 ‘짜깁기’ 프린트 필름의 신세로 상영되어야 했던 이 걸작 영화를 보다 원본에 가까운 모습으로 보전하기 위한 세계영화계의 노력이 낳은 산물이다. 필름의 질감을 100% 구현하지는 못했다는 점, ‘짜깁기’에 썼던 해외용 프린트필름에 새겨진 자막 자국을 벗겨내야 한다는 점 등은 여전히 남아있는 과제이지만 디지털 복원판 <하녀>는 과거의 영화를 기억하기 위한 ‘지금 현재’의 노력들이 최고점에 달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영화제 뉴 커런츠 심사위원이기도 한 배우 이화시씨가 히로인을 맡은 <반금련>은 그야말로 ‘고고학적 발굴’에 걸맞을 곡절 깊은 작품이다. 1974년, 충무로를 대표하는 굴지의 영화사 동아수출공사가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여 기획한 역작. <하녀>부터 <화녀>, <충녀>까지 이름을 날린 흥행감독이면서 동시에 범접할 수 없는 독특한 영화세계를 구축하고 있던 김기영 감독이 성(性)을 주제로 한 중국 4대 기서 ‘금병매’를 영화화하는 회심의 프로젝트. 당대 최고의 남자배우 신성일과 김영애, 염복순, 박정자 등 스타 여배우들이 대거 출연하고, 여주인공 ‘반금련’ 역할은 오디션으로 발탁한 베일에 싸인 신인배우를 쓰는 등 화려한 배역진으로 무장한 작품. 이처럼 제작 초기에만 해도 이 영화 <금병매>를 수식할 수 있는 화려한 어구들이 넘쳐났음에도, 숱한 사전검열과 제작방해에 부딪힌 이 영화는 수년을 끌다가 정권이 바뀐 1981년에서야 <반금련>이라는 이름으로 개봉되었다. 이미 난도질을 당한 뒤였고, 제작사가 스타로 키우려 숨겨뒀던 히로인 이화시는 이미 이 영화에 20대의 대부분을 바친 후였다. 그리고 그렇게 근 30년이 흘렀다. 1997년 김기영은 ‘부활’했고, 2008년 이화시는 다시 영화인으로 복귀했지만, 그들, 그 감독과 그 배우들, 그리고 그 제작진들이 함께 꿈꿨던 이 희대의 야심작은 아직도 ‘발굴’을,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잘려나간 조각들을 찾아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