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를 앞두고 녹초가 된 프로그래머들이 가장 많이 듣는 난감한 요구는 “똘똘한 영화 몇 편만 추천해달라”는 말일 것이다. 반면 많은 상영작을 다 관람할 수 없는 관객들에겐 어떤 가이드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영화제 개막 전에는 항상 적지 않은 실랑이가 오간다. 프로그래머들은 “어느 자식이 소중하지 않겠느냐”고 물러서고, 기자들은 “그래도 손가락 깨물면 더 아픈 자식이 있을 것 아니냐”고 추궁한다.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 지세연, 기준영 프로그래머와의 실랑이 끝에 얻어낸 추천작 리스트. 각기 다른 관객들의 입맛을 모두 충족할만한 황금 메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시간 쪼개서 극장 나들이 할 관객들에겐 꽤 요긴한 정보가 될 것이다.
지세연 올해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의 가장 큰 변화는 국제경쟁부문을 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상영작의 원활한 수급이나 영화제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지세연 프로그래머는 국제경쟁부문을 도입한 이유를 “다양한 관객들을 위한 배려”라고 설명한다. “지난해에는 첫해 영화제이다 보니 아무래도 영화제 특성에 맞게 고전 소개에 충실했지만 올해는 젊은 관객들도 보다 쉽게 접근하고 즐길만한 대중적인 작품들도 많이 선별해서 넣었다. 누군가는 너무 평이한 프로그래밍이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 말이 대중성이 더 가미됐다는 평가로 들린다” 새로 경쟁부문 섹션을 만들어 “국내 프리미어 상영작을 유치”한 건 결국 다양한 관객들을 포섭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게 그의 덧말. 어느 섹션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서 죽도로 뛰었다는 지세연 프로그래머지만, 가장 큰 애정을 갖고 있는 부문이 있긴 하다. “예매율이 상대적으로 뒤쳐져 있는” ‘아시아 영화의 재발견’ 섹션. “프로그램 짜면서 공부 많이 했다”는 그는 “이치가와 곤의 작품들은 물론이고 <암화> 같은 작품은 국내에서 잠깐 개봉하고 말았는데 꼭 극장에서 봐야한다”며 ‘강추!, 강추!’, 연발이다. 내친 김에 그는 거장 소리 듣는 “유명 감독들의 초기작”을 주로 모아놓은 ‘칸 감독주간 40주년 특별전’도 꼭 들러보라고 등떠민다.
지세연 프로그래머의 추천작 <핸들 미 위드 케어>/콩데이 자투라나사미/국제경쟁부문/감정의 극단을 보여주지 않되, 감정을 흔들 줄 아는 새로운 타이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스탠리 큐브릭/CHIFFS 매스터즈/신의 손 더글라스 트럼블과의 만남을 위해서 몇 번이고 곱씹어야 할 영화. <솔로 써니>/콘라트 볼프/독일영화사 특별전/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설 줄 아는 한 여자 이야기. <이누가미 일족>/이치가와 곤/아시아 영화의 재발견:작가/이치가와 곤 만의 독특한 편집을 맛볼 수 있는 영화. 영화 공부 하는 사람들은 필히 관람! <잠복근무>/노무라 요시타로/아시아 영화의 재발견:장르/알프레드 히치콕의 아류라고 홀대받았던 스릴러 장인이 선사하는 느림의 긴장.
기준영 상영작을 골랐으니 느긋하게 개막식을 기다리면 된다? 기준영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는 오해 말라고 고개를 젓는다. “다른 팀이 프로그램 자료를 요청하면 처리해줘야 하고, 개막식 등의 행사에 참여할 국내 게스트들의 주차 문제까지 신경써야 할 일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거다. 인터뷰 전날도 개막식 시뮬레이션에 참여하는라 “쪼개서 잠을 잤다”고. 그렇다고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그가 “적당한 긴장과 스트레스야말로 영화제를 만드는 재미”라고 덧붙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괜한 자위는 아니다. 올해 새로 마련한 ‘장선우-전’에 거는 기대 때문이다. “<성공시대>부터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까지 장선우 감독이 만들었던 지난 20년 동안의 영화들은 매번 사회의 민감한 부분들을 에두르지 않고 관통했다. 그의 도발은 지금 돌이켜봐도 역동적이다” ‘한국영화추억전 #8’에서 충무로의 과거를 맛보고, ‘충무로 NOW’에서 한국영화의 미래를 예감하고 싶은 관객들은 “두 섹션의 가교”라고 부를 수 있는 ‘장선우-전’을 놓치지 말라고 기준영 프로그래머는 신신당부한다. “<나쁜 영화>의 경우 결국 무삭제본을 찾지 못했다. 결국 장 감독님이 그나마 맘에 들어하시는 일본 상영 버전으로 상영하게 됐는데 너무 아쉽다”는 그는 마지막까지도 장선우 감독과의 대화(10일 오후 2시, 명동아트센터)를 홍보하기 바빴다.
기준영 프로그래머의 추천작 <거짓말>/장선우/장선우-전/포르노 논란 이후 모두 소각됐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홀연히 나타난 113분 무삭제본. <잘돼갑니다>/조긍하/한국영화추억전 #8/ 1968년 개봉 직전 높으신 분들의 한마디로 상영이 좌절된 비운의 정치풍자물. <자유결혼>/이병일/한국영화추억전 #8/ 법정허락을 통해 저작권 문제를 어렵게 해결한 영화. 극중 연인으로 나오는 조미령과 박암의 ‘밀고 당기기’가 관전 포인트. <125 전승철>/박정범/충무로 NOW/ 출연키로 했던 탈북 새터민이 세상을 뜨자 감독이 직접 탈북 새터민 연기를 한 영화. 감독의 뚝심과 눈빛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