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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바람 거센 발리우드

고단한 삶 위무하는 판타지에서 할리우드 휘두르는 장르영화 꿈꾸기까지 인도영화 성장기

<가문의 법칙>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인도의 대중에게 3시간30분짜리 판타지를 제공하는 꿈의 공장’. 오랫동안 인도영화를 수식해온 말들 중 하나다. 특히 도시의 고급문화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일반 서민과 인도 사회의 독특한 위계체계에서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3시간30분 남짓한 동안 근대성과 전통, 종교와 과학, 옛것과 새것, 동양과 서양이라는 소재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던 영화는 비록 오락물이라는 외관을 하고 있었지만 그야말로 문화의 전장(cultural battleground)이라 불릴 만했다. 하지만 1990년대 초 경제개혁이 시작되면서 인도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은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거센 변화의 물결에 직면했고 인도영화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단돈 10루피(한화 250원)’로 꿈을 살 수 있는 영화관은 점차 농촌 지역이나 도시 외곽의 정체 모를 냄새가 가득한 영화관들을 지칭하는 말로 변질되기 시작했고, 도시의 영화관들은 그보다 스무 배나 비싼 관람료를 요구하면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인도 서민들에는 점점 더 문턱을 높여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인도영화를 존속시켰던 고단한 삶을 사는 그들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동안 인도영화는 ‘높은 문턱’을 드나드는 이른바 ‘신중산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에 이끌려 변하기 시작했다.

경제개혁이 인도영화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바로 ‘신중산층’(new middle classes)이란 개념을 탄생시킨 것이다. 사실 어느 문화에서나 ‘중산층’을 정확하게 규정하기란 어려운 문제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도 신중산층은 규모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어림잡아 2억 명은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들은 사회와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서서히 인도 대중문화의 생산과 소비 양식을 바꾸어놓기 시작했고, 특히 인도영화는 그들이 ‘직접’ 생산하고 소비하는 대표적인 매체로 자리 잡았다. 여기서 ‘직접’이라는 말은 여러모로 함축하는 것이 컸다. 그들이 ‘직접’ 영화의 생산과 소비에 간여하면서 영화의 소재가 변했고, 영화 자본의 형성 과정과 규모가 바뀌었으며, 영화의 기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전: 사랑과 영웅에 관한 이야기 전성기

여기서 1980년대 이전의 인도 영화계를 잠시 살펴보자(이 시기는 독립 이전과 독립 이후의 두 시기로 나눠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오늘날의 인도영화와 좀 더 가까이 위치한 독립 이후의 상황만을 살펴보겠다). 독립 직후의 인도는 새로운 국가 형성의 발판을 준비하던 분주한 시기였다. 새로이 공포된 헌법은 세속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여성과 전통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던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강조는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고 기득권층에게는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기대감과 불안감의 만남은 물리적, 정신적 폭력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영화가 분쟁 해결의 중재자 노릇을 떠맡게 되었고, 영화를 인도 헌법의 목표와 좀 더 가까운 곳에 두고자 했던 인도 정부는 영화계에 전례 없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이러한 상황은 영화의 생산과 소비 주체를 명확히 구별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영화 생산자는 오늘날의 신중산층과 구별해 ‘구중산층’(old middle classes)이라 불리는 엘리트 계층의 사람들과 정부였고, 소비자는 국민이었다. 영화제작자들과 정부가 식민지 경험을 가진 인도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고민의 초점을 맞추다 보니 영화의 소재들도 다분히 제한적이었다. 독립 직후에는 국가라는 개념과 민족주의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주를 이뤘고, 이후 1960년대에는 사랑 이야기, 70년대에는 가족을 지키는 영웅의 탄생과 성장에 관한 영화들이 등장해 198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한다.

한편 독립 이후부터 영화의 자본 형성 과정에도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오랜 식민지 경험은 사회 전반에 ‘부족’과 ‘결핍’을 남겨놓았다. 하지만 부족과 결핍이 영화계에는 호재로 작용했다.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던 암시장 경제가 특이하게도 물자를 만드는 데 쓰이기보다 영화산업에 눈을 돌린 것이다. 이로써 독립 이전 스튜디오에서 월급을 받으며 영화를 촬영했던 배우들이 스튜디오 밖으로 몰려나왔고 제작자들은 히트작을 만들기 위해 골몰한다. 인도의 모든 영화제작자들이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찾아 낸 공통분모는 스타와 노래와 춤이었다. 인도영화의 판타지가 그 원형을 찾는 순간이었다.

신중산층의 등장과 영화의 산업화

하지만 경제개혁 이후 이러한 인도영화의 요소들은 신중산층의 도래와 함께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신중산층이 가장 먼저 변화시킨 것은 영화의 소재였다. 이전의 인도영화들이 다룬 소재가 극히 제한적이었다면 신중산층이 제작과 소비에 직접 참여한 영화들은 소재의 제한을 두지 않았다. 액션(<>(Dhoom)), 전쟁(<카불 익스프레스>(Kabul Express)), 인도와 파키스탄 분립(<비르와 자라>(Veer Zaara))은 물론, 최근 들어서는 결혼과 별개의 사랑(<훔뚬>(Hum Tum), <살람 나마스테>(Salam Namaste)), 조직폭력 집단(<가문의 법칙>(Sarkar Raj)), 스포츠(<골>(Goal))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들을 발전시켜왔다. 신중산층에게 영화는 고단한 삶을 잊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닌 자신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했다. 소재가 다양해지고 영화 제작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자본 형성 과정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신중산층은 점점 큰 규모의 자금을 영화산업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탄생한 영화들은 다시금 그 수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신중산층 관객 몰이에 성공하며 자본을 축적해갔다.

인도영화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이 더욱 거세진 것은 2000년 이후부터다. 특히 영화가 ‘산업’으로 인정받으면서 정부는 물론 거대 자본을 손에 쥔 산업가들이 영화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그 시발점이었다. 이후 인도 최대의 경제인 단체인 인도산업연맹(CII) 연례회의에 영화산업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이 따로 배정되기 시작했고, 지난 몇 년간 인도 경제인들은 꾸준히 해외 유수 영화제에 달려갔다. 특히 올 5월에 열린 칸영화제에는 경제인과 정부 관계자만 100여 명이 참여하면서 역대 최대 규모의 인도영화 사절단으로(?) 기록됐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해외영화제에까지 찾아다니면서 인도영화 홍보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인도영화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첫째 질문에 대답은 예상대로 간단하다.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는 인도영화 시장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더 올려보겠다는 것이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둘째 질문인데, 대답은 ‘경제인들이 영화자본 형성에 간여하기 시작하면서 인도 영화산업이 더욱 할리우드화하고 있다’라고 하겠다. 예산의 규모가 커지면서 점차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의 면모를 갖추려는 시도들이 준비되고 있고, 영화 관람료 수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파생상품의 개발에까지 그 영역이 커지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개봉한 애니메이션 <하누만>(Hanuman)은 영화 관람료에서 얻은 수익보다 아이들의 필통, 옷, 신발 등에 적용한 캐릭터 상품이 더 인기가 있을 정도였다. 한편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와 손을 잡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인도 릴라이언스그룹의 암바니 회장이 스필버그 감독과 합작투자할 의사를 밝히고 미국의 250여 개 극장을 인수하기 시작한 것이 그 좋은 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인도영화는 변화의 정점에 서 있다고 하겠다. 느리지만 꾸준히 진행되는 경제개혁은 지금도 계속해서 신중산층을 양산하고 있고, 인도 경제인들의 영화산업으로 옮기는 발걸음은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인도영화가 할리우드산 영화와 구별하기 어려워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들 한다. 하지만 1913년 인도의 첫 장편영화 <하리시찬드라>(Harishchandra)가 상영된 이후 지금까지 인도영화는 외래적 요소, 특히 할리우드를 인도문화라는 여과장치를 통해 재해석해내면서 아무에게도 종속하지 않은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꿈의 공장은 돌아가고 있고, 각 지역 언어권 영화들까지 줄기차게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오늘날 인도영화계에 부는 변화의 바람은 어찌 보면 새로운 장르의 개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