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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 그리고 좀비까지
2008-07-21

부천을 찾은 퀴어영화들

<시암의 사랑>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는 예년에 비해 많은 수의 퀴어영화가 눈길을 끈다. 퀴어 장르영화 특별전으로 마련된 ‘큐리어스’ 섹션 상영작을 비롯, 유럽과 미국, 아시아 등 다양한 지역에서 찾아온 따끈따끈한 퀴어 영화들은 각각의 영화 문화에서 현재 퀴어 이슈가 어떻게 설명되고 재현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규 섹션에서 소개되는 퀴어영화 신작들은 단단한 퀴어 정치학을 보여주기보다는 대중영화적 감수성 안에서 퀴어 이슈를 담아내는 데 주목한다. ‘오프 더 판타스틱 섹션’의 상영작인 <쓰리 돌스>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세 소녀의 배낭여행이라는 성장 로드무비의 내러티브 안에 성 정체성에 대한 발견과 혼란을 담아낸다. 언뜻 발랄하고 산뜻하게만 보이던 소녀들의 무전여행은 섹슈얼리티라는 이슈를 만나 대면하는 혼란스러운 과정으로 변화하고, 그 과정은 결코 명쾌한 해답과 해피 엔딩으로 정리되지 못한다. 그 어떤 대답을 갖지 못한 채 곤혹과 피로에 빠진 그녀들에 대해, 영화는 성장 그리고 정체성의 인식이라는 과정이란 결코 단순한 인과나 결말을 갖지 못하는 끝없는 여행 같은 것임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추키아트 사크위라쿨의 <시암의 사랑>은 어린 시절의 우정이 그 이상의 감정으로 발전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두 소년의 감정적 변화를 따라가고 있는 영화로, 두 소년 뿐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가족, 친구 등 다양한 관계 내에 있는 감정적 움직임을 세밀하게 담아낸다. 다소 관습적인 내러티브와 소위 ‘꽃미남 주인공’들은 기존에 보아온 아시아 퀴어 영화들의 또 다른 반복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아시아 대중영화 내에서 동성애가 다루어지고 있는 어떤 문화적, 지역적 조건과 맥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민해 볼만 하다. 한편 늘 동성애에 대한 언급을 작품 안에 서명처럼 기입하고 있는 크리스토퍼 오노레의 <사랑의 찬가>는 뮤지컬이라는 환상적 설정 안에서 동성애/이성애라는 엄격한 구분과 그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관계 자체를 열린 방식으로 사고하고 그 안에서 해답을 찾고자하는 오노레의 지속적인 관심사를 보여준다. ‘스트레인지 오마쥬’ 섹션에서 상영되는 <세비지 그레이스>는 90년대 미국 뉴 퀴어 시네마의 기수 톰 칼린의 신작. 칼린은 동성애 그 자체에 대한 탐구보다는 살인이라는 극단적 행위가 인간의 다양한 섹슈얼리티와 어떻게 연관 맺는지를 살피는데 주목한다. 그러나 그 시선은 직접적인 진술보다 어떤 뉘앙스 혹은 모호함을 통해 전달된다. 때때로 그 모호함이 가진 탐미적인 성격은 이 엽기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게끔 한지만, 이 영화가 가진 흡인력은 바로 그 거리와 간격에서 나온다.

특별전으로 마련되는 ‘판타스틱 감독백서’ 섹션에서는 미국 독립영화의 대표주자이자 퀴어 감독인 그렉 애러키의 데뷔작인 <리빙 엔드>의 디지털 리마스터 버전과 함께 <완전히 엿먹은>, <미스테리어스 스킨> 등 퀴어 영화 진영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35mm로 확대된 16미리 화면의 거친 입자와 극단적인 좌파 메시지로 가득한 <리빙 엔드>는 애러키를 퀴어 정치학의 최전방에 위치시켰던 문제작이다. 마지막으로 특별전 ‘큐리어스’는 장르영화의 자장 안에서 퀴어적 존재들이 보여온 변화를 시대적 순서에 따라 만나볼 수 있는 섹션이다. 바질 디어든의 <희생자>와 윌리엄 프리드킨의 <크루징>은 퀴어를 범죄화하던 당시 장르영화들의 태도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라면, <크로머의 늑대들>과 <트리플 X의 악녀일기> 등 비교적 최근 작품들은 장르 영화의 원형을 적극적으로 퀴어적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거나 혹은 착취(!)당해온 퀴어 섹슈얼리티를 재건하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퀴어 시네마 지형에서 가장 당돌하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감독으로 유명한 브루스 라브루스의 신작 <엽기좀비오토>는 좀비라는 호러영화의 원형적 캐릭터가 가진 가장 정치적으로 불온하고 혁명적인 본질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전혀 다른 선상에서, 양윤호의 <가면>은 2008년 현재까지도 동성애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가 대중영화 안에서 아무런 여과 없이 등장할 수 있다는 한국영화의 어떤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박진형=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