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 두 프로그래머의 얼굴은 조금 어두웠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 때문이기도 했고, 회고전 프린트가 불량품으로 도착하는 등 작은 사고도 여럿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올해 두 프로그래머의 얼굴색은 훨 밝아졌다. 예년보다 훨씬 높은 예매율과 썩 괜찮은 날씨 덕분일까. 들어보니 그것 말고도 밝게 웃을 만한 이유가 꽤 많다. 영화제 개막 하루 전.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며 황급히 뛰어다니는 권용민 프로그래머와 박진형 프로그래머를 부천 복사골문화센터 게스트 라운지에 불러 세웠다.
-마침내 시작이다. 지난해와 비교해서 달라진 점들이 뭐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올해는 개막 전날에 전야제를 크게 열기도 하는데. =권용민: 지난해에도 일주일 전에 전야제를 열긴 했지만 올해는 규모가 더 커졌다. 엠넷 뮤직페스티벌이 통째로 들어와서 진행하는 행사다. 알렉스가 사회를 보고 장윤정, SG 워너비, 샤이니 같은 가수들이 온다. 이처럼 지난해보다 내실 있는 스폰서들이 참 많이 들어왔다. 내부적으로도 놀라는 부분이다. 영화제에 대한 호응이 지난해보다 더 커진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다. =박진형: 아주 긍정적인 분위기다. 영화제와 파트너십을 맺으려는 기업들이 늘어난 건 부천국제영화제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니까. 지난해 영화제를 끝내고 영화를 선정하러 여러 영화제들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때부터 올해 영화제가 더 좋아질 거라고 예상했다. 일을 가져가려는 파트너들의 태도라거나, 여러 면에서 사람들이 부천영화제에 훨씬 협조적이고 긍정적이었다. 올해 영화제가 어느 정도 궤도에 안착한 것도 그런 것들 덕이 아닌가 싶다.
-올해 영화제에서 가장 신경을 쓰며 준비한 부분들은 뭔가. =권용민: 내부적으로 이야기한 것 중 하나는 상영작의 숫자에 구애받지 말고 영화제 질을 매 회 한 단계씩 천천히 높여나가자는 거였다. =박진형: 어떤 부분에 힘을 주는지에 따라서 영화제의 색깔이 달라질 수 있다. 이를테면 로테르담영화제는 초청 게스트의 이름값보다는 새로운 감독 발굴에 더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월드 프리미어 숫자가 많다. 반면에 폭탄도 많이 만나게 되지만.(웃음) 그러나 그런 게 영화제의 활력이 아닌가 싶다. 올해 부천도 마찬가지다. 경쟁작과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부문 초청작의 감독 연령이 예년보다 낮아졌다. 아무래도 장르영화란 신인 감독의 재능을 처음으로 선보일 수 있는 효과적인 틀이니까. 그러나 젊은 감독의 신작이어서 무조건 가져왔다는 의미가 아니다. 미래가 보이는 작품들을 가져왔다는 말이다. =권용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영화제의 외적 기준이 월드 프리미어의 편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올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더라. 뚜렷한 특징이 없으면 한국 최대라거나 아시아 최대라거나, 최고 규모라거나, 이런 타이틀이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보다는 한국에서 꼭 보여주고 싶은 영화를 데려오는데 주안점을 줬다. 사실 인도영화 <가문의 법칙>도 이미 인도와 영미권에서 개봉한 상태라 기껏해야 ‘코리안 프리미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꼭 부천에서 보여주고 싶어서 가지고 왔다.
-올해 영화들을 미리 보다 보니 스페인어권 장르영화들의 부상이 눈에 확 띈다. =박진형: 지난해에도 그랬는데 영화를 많이 안 봤 었나봐.(웃음) 스페인은 사실 세 손가락에 들어가는 장르영화 대국이다. 판타지 장르 자체가 워낙 인기가 많고 내수시장도 큰 덕택이다. 특히 최근 2~3년 사이 스페인계 장르영화의 질이 아주 좋다. 감독들의 순환도 빠르고 프로덕션도 안정적이고 최근에는 북미, 남미권과 공동제작하는 경우도 많다. =권용민: 한국시장의 특징인지 PiFan 관객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국가별로 따져보자면 올해 역시 일본영화의 수요가 가장 크다. 스페인영화도 3위를 차지하고 있고, 다음이 인도영화다. =박진형: 지금 예매 상황을 보면 확실히 한국 관객의 선호도 같은 게 보인다. 일본, 영미권 작품이 여전히 인기가 많고, 스페인 작품들은 자국 호러영화 퀄러티가 점점 한국 관객에게도 안정적으로 다가가는 것 같고, 인도 영화는 골수 마니아들이 많고. 다양한 국가의 장르영화를 소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어떤 국가의 영화들이 어떻게 한국 관객에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세밀하게 관찰할 필요도 있겠더라.
-올해 부천의 가장 중점적인 행사는 NAFF다. 이걸 왜 시작하게 된 것인가. =권용민: 출발점은 ‘영화제에 어떤 역할이 필요한가’ 하는 질문이었다. 영화제는 관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화인을 위한 공간의 기능을 담당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뭐가 필요할까? 마켓은 애초부터 머릿속에 없었다. 아는 것부터 출발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알게 된 영화인들을 한자리에 모으면 뭔가 재미있는 기획이 되지 않을까 싶더라. 사실 많은 감독들이 한국에서 영화를 찍고 싶어한다. 그들을 배급사, 제작사, 투자사 사람들과 만나게 하면 뭔가 벌어질 게 분명했다. 인도네시아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한국 감독이 감독하고 일본이 제작하는 영화가 나올 수도 있지 않겠나. =박진형: 올해 NAFF에 참가하는 히로키 류이치나 시미즈 다카시 같은 감독들도 자기 영화를 한국에서 팔 수 있는지 물어보더라. 이렇게 요구가 거꾸로 산발적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인더스트리 스크리닝을 한 영화들도 네편이 팔렸다. 이미 반 이상은 판이 깔려 있었다고 할까. 마켓으로 키울 욕심은 없다. 그런식으로 외형만을 확장하는 데는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예매율은 어떤가. =권용민: 아주 좋다. 어제까지 이미 59편이 온라인 예매에서 매진됐고, 내일이면 70~80편 예매 매진으로 영화제가 출발하게 될 것 같다. 그런 것에 힘을 얻어서 영화제가 본격적으로 개막하기 전부터 벌써 스탭들의 감정의 흐름이 하나로 몰려서 돌아간다는 느낌도 받는다.
-가장 빨리 매진된 작품들은 뭐였나. =권용민: 역시 스타인 에이타가 등장하는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그리고 놀랍게도 스웨덴영화인 <선생님은 외계인>. 지난해 스웨덴 국내 흥행 1위작이긴 하지만 이유를 잘 모르겠다.(웃음) 가족영화라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하여튼 지금 예매율이 지난해보다 상당히 좋은 편이다. =박진형: 그러나 역시 문제는 날씨다. (웃음) 특히 올해는 폭염 때문에 걱정이 크다. 특히 바깥에서 활동하는 자원봉사단 친구들이 날씨가 매우 후텁지근해서 고생이 많을 것 같다.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권용민: 게다가 일요일에는 비가 한차례 온다더라고. 그날이 씨네락 행사가 있는 날이라 걱정이었는데 어차피 크라잉넛이 공연하는 거니 그냥 밀어붙이자고 했다. (웃음) =박진형: 한차례가 아니다. 이번 주말 지나면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있던데…. 그래도 부천이 판타스틱영화제하기에는 괜찮은 장소 아닐까. 외국인 게스트들은 부천 향락가의 네온사인을 보며 <블레이드 러너>를 떠올리더라. =권용민: 일본 게스트들이 숙소 근처의 건물을 보고 깜짝 놀라더라니까. 지하가 노래방. 1층은 식당. 5층은 교회. 중간층은 모두 마사지 클럽. (웃음) =박진형: 어느 순간 부천이라는 도시가 나를 압도하더라. 판타스틱영화제하기에는 최고의 도시다. (웃음)
박진형 프로그래머 추천작 10
<페르마의 밀실> - 크기가 줄어드는 밀실, 생존을 위한 두뇌싸움이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클론 바이러스> - 내전으로 얼룩진 콜롬비아를 배경으로, 포스트 9·11 음모론이 SF적 상상력과 만난다. <사타나스: 살인자의 초상> - 각자 어두운 비밀을 가진 세 사람의 극단적 악행 일기. <52구역> - 기억의 상실과 재구성이라는 SF적 원형이 자아성찰적 스타일과 결합하는 야심찬 데뷔작. <월드 레볼루션: 드라디바벨> - 빈 출신의 발칙한 록 밴드 드라디바벨, 그 불온하기 짝이 없는 혁명적 퍼포먼스에 대한 보고서. <스마일리 페이스> - 정신 놓친 언니 제인의 좌충우돌 모험에 숨은 미국 중산층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남자가 여자를 도청할 때> - 구소련의 유물인 도청과 감시는 또 다른 멜로드라마적 사건을 낳는다. <희생자> - 유러피안 시네마의 왕자 더크 보가트가 제2의 연기 이력을 시작하게 된 문제작.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 맹인 박노식의 ‘나는 화살 잡기’와 ‘호두로 악당 쓰러뜨리기’ 액션은 지금 보아도 압권. <공구 살인마> - 토비 후퍼가 리메이크했던 원작. 아무 이야기 없이 살인만으로 전개되는 초반 15분은 B급 슬래셔의 순수한 즐거움을 제공한다.
권용민 프로그래머 추천작 1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 - 출산율 최고의 마을의 비밀. 섹스가 혁명을 일으킨다. <가문의 법칙> - 발리우드 정상급 배우들이 출연한 인도의 <대부>. <러브러브 익스프레스> - 인도에서 날아온 경쾌한 코미디. <대초원의 철새> - 1960년대 일본영화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일본판 웨스턴무비. <더 스크린> -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여름밤의 열기를 날려버릴 타이 호러. <칼라 말람 불란 멩감방> - 호러와 코미디, 멜로와 누아르가 흑백 영상으로 마술처럼 풀려간다. <14km> - 자유를 찾아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가 아름답다. 하지만 또 하나의 주인공은 숨막히게 광활한 사막. <우리도 사랑한다> - 올해 칸 마켓의 은근한 화제작. 나이 든 어른에게 찾아온 단 한번의 사랑이 가슴을 친다. <오 빠이 오> - 생활의 고단함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삶의 모든 순간이 뮤지컬로 뒤바뀌는 슬럼가 사람들의 일상. <꽃과 뱀> - 개봉한 <꽃과 뱀>의 오리지널 버전. BDSM의 고전소설인 <꽃과 뱀>을 영화로 옮긴 첫 번째 작품이자 닛카츠 로망 포르노의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