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손 웰즈의 영화가 RKO 영화사의 재정 위기를 초래한 1942년, 구원투수로 등장한 사람이 발 류튼이다(훗날 최고의 작가로 위치한 웰즈와 B급영화를 제작하던 남자를 나란히 언급하게 만든 사연은 영화사의 한 아이러니라 하겠다). RKO가 바랐던 건 1930년대에 유니버설사가 제작한 ‘몬스터’ 시리즈처럼 관객의 흥미를 확 잡아끌 오락거리였을 텐데, 류튼의 목표는 좀 더 높았다. 데이비드 O. 셀즈닉 휘하에서 영화경력을 시작한 류튼은 저예산으로 제작된 질좋은 영화를 내놓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자율권을 보장받은 류튼은 감독, 촬영, 각본, 미술, 음악을 담당할 지인들로 ‘호러 사단’을 구성했고, 그의 사단이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은 호러영화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절, 불세출의 제작자들이 이름을 날렸지만, 류튼의 존재감은 그중 각별하다. 짧은 기간 동안 호러영화 장르에 전념했던 그는 일개 제작자의 역할을 넘어서는 일들을 해냈다. 셀즈닉의 영향을 받아 영화의 제작과정 전체를 통제하길 원했던 그는 캐스팅, 미술, 의상, 편집 등에 관여한 것은 물론, 모든 각본마다 손을 대야 직성이 풀렸다. 영화에 입문하기 전 잡다한 분야에서 글을 써댄 경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의 지시사항이 일일이 기록된 각본은 감독의 머리 위에서 연출을 지휘, 관리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연출을 맡은 자크 투르네르, 로버트 와이즈, 마크 롭슨이 나중에 대가 또는 작가로 성장했음을 감안하면, 혹자는 한낱 제작자가 왜 항상 먼저 언급되는지 의아할 게다. 이유는 간단하다. 발 류튼의 영화에 대한 일관된 비전이 감독을 뒤로 밀어낼 만큼 대단했다는 것이다. 류튼 사단은 첫 두 작품 <캣 피플>과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로 그들의 의도를 선명하게 밝혔다. 영화는 결코 죽음과 폭력을 직접 보여주지 않았고, 괴물이 사라진 자리에 ‘어둠과 그림자’의 세계가 등장했다. 숨기를 거부한 주인공이 제발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 매혹을 맛보는 사이, 너울대는 그림자와 꺼림칙한 소리를 실감하며 스크린 밖을 상상하는 관객은 전혀 새로운 공포를 경험했는데, 그건 정녕 아름다운 공포였다. 대표적인 예로, <시체 도둑>에서 보리스 칼로프가 모는 죽음의 마차가 눈먼 여가수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는 장면의 슬픔과 공포와 아름다움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류튼의 영화가 비단 스타일의 추구에 그치지 않고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대립을 통해 전복적인 환상성을 성취했다는 점이다. 신, 이성, 현실, 과학, 정신분석은 매번 악마, 미신, 전설, 심령, 마법과 충돌하고, 선과 악의 경계가 흐려진 지점에서 주인공과 관객은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진다. 그것은 이전 영화들이 한번도 닿아보지 못한 영역이었으며, 현대의 호러영화와 판타지영화는 그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두 편의 영화로 성공을 거둔 류튼은 <레퍼드 맨>, <일곱 번째 희생자>, <유령선>, <캣 피플의 저주>를 연거푸 만들면서 입지를 강화하는 듯했지만, 방향을 선회해 만든 시대극과 드라마의 실패와 호러 아이콘 보리스 칼로프의 도움으로 의욕 넘치게 제작한 <바디 스내쳐>, <죽음의 섬>, <배들램>의 부진 끝에 RKO를 떠나 이런 저런 영화사를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류튼은 A급영화를 제작하기를 열망한 B급영화 제작자였다. 그러나 류튼이 드라마, 시대극, 코미디를 시도할 때마다 그르침과 미완성을 반복했다는 사실은 그의 본령이 ‘공포’의 영역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난 궁금하다. 그가 자신을 영화계의 에드가 앨런 포로 규정했다면 이후 삶이 어쩌면 바뀌지 않았을까, 그는 자기 영화가 ‘해머 호러’ 같은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리란 걸 예감했을까. 이제는 걸작으로 대우받는 아홉 편의 호러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마흔일곱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그를 애도하곤 한다.
류튼의 삶과 영화를 다룬 다큐멘터리 <발 류튼: 그림자 속의 사나이>를 연출한 켄트 존스는 링컨 필름 센터의 프로그래머, <필름 코멘트>의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는 영화평론가이자 작가다. 연출과 각본을 겸한 존스는 깔끔한 영화 분석과 역사적 사실 그리고 애정 어린 헌사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는데, 연대순으로 정리된 작품의 클립은 류튼을 몰랐던 관객에게 친밀한 안내서로 손색이 없다. 류튼의 열광적인 팬인 마틴 스코시즈(존스는 스코시즈의 <나의 이탈리아 영화 여행>의 각본에 참여한 적이 있다)가 다큐멘터리의 제작자와 내레이터로 나섰으며, 그외에 평론가와 감독들이 인터뷰에 임했다. 그들 가운데 B급영화의 대부 로저 코만과 저예산으로 A급 공포영화를 만드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출연이 인상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