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하면, 한상차림이다. 올해로 아홉돌을 맞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준비한 상영작들이 스크린에 담아 낸 푸짐하고 다채로운 상차림이라면, 영화제에서 특별기획 프로그램으로 내놓은 전주 매그넘 영화 사진展 <<Magic of Cinema>>는 액자라는 그릇에 골라 담은 특별식이다. 영화를 사진이라는 매체로 만난다는 점에서 영화제를 찾은 관객들에게는 여러모로 새로운 식단이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로버트 카파를 시조로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는 광고문구를 역사로 만든 다큐 사진그룹 ‘매그넘’의 팬들에게는 보도의 최전선에서 한숨 돌린 휴식 같은 사진이라는 점에서 각별할 것이다. 아니면, 매그넘의 눈으로 현대 영화사를 바라볼 기회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전시장은 고사동에 위치한 전주 매그넘 영화 사진展 특별전시관이다. (구) F#빌딩이며 객사에서 멀지 않고 영화의 거리에서도 도보로 접근이 가능하다. 입구를 지나 들어서면 전시장은 두 갈래 길로 나뉜다. 6개로 구성된 프레임의 터널을 순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왼쪽길이 옳은 시작임을 잊지 말자.
매그넘이 만든 여섯가지 사진 식단
첫 번째 벽은‘배우의 초상’. 모니카 비티의 도전적인 정면과 마들렌 디트리히가 보여주는 고혹적인 뒤태에 이끌려 따라가면, 어깨 아래를 이불로 감싸고 한쪽 가슴을 반쯤 드러낸 포즈의 마릴린 먼로가 눈웃음으로 유혹한다. 여성성을 농축해 프레임 안으로 불러들인 사진들은 매그넘 최초의 여성회원 이브 아놀드의 작품이다. 이어지는 4장의 사진은 필립 할스먼의 <점프북> 연작이다. 브리짓 바르도, 딘케인과 제리 루이스, 크레이스 켈리, 할스만 그 자신과 마릴린 먼로가 공중에 뜬 사진이 이어지면 순간에 포착된 자유로운 표정에 어린 시절 공터에서 뛰던 트램블린이 떠오른다. ‘배우의 초상’과 마주보는 두 번째 벽 ‘영화 속 배우’에는 현장에서 포착한 배우의 모습이 담겨 있다. 파도와 바람에 맞선 <백경>의 그레고리 펙과, <미스피츠>의 카우보이 클라크 게이블, 환풍구 장면으로 유명한 <7년만의 외출> 속 마릴린 먼로를 만나게 된다. 작품설명에 먼로의 늘씬한 다리가 노출된 것에 불만을 가진 두번째 남편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게 된 뒷이야기가 적혀있다.
감독들의 특징이 한 장 사진에 포착된 ‘빛의 거장’은 세번째다. 동선을 따라 꺾인 벽면에는 이때가 아니라면 언제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자문할 만한 사진들이 이어진다. 히치콕과 트뤼포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하는 사진은 전시장 밖에서도 대형사진으로 볼 수 있지만, 전시장 안의 84점은 모두 오리지널 프린트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대화에 심취한 유세프 샤힌, 꼭 닮은 두 마리 개에게 먹이를 주는 존 휴스턴, 턱이 잡혀 놀란 고양이의 머리 뒤에 눈빛을 빛내는 장 피에르 멜빌이라니. 갈대 숲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문 사이로 엿보는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뒷모습에서 감독이 본 문 밖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네번째는 ‘카메라와 조명이 있는 풍경’, 카메라가 돌아가는 현장의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다. 촬영장에서 만난 알랭 레네의 옆얼굴은 빈틈없이 완고하고, 거대한 촬영 카메라 앞에 두 다리를 뻗고 앉은 흰 머리의 채플린은 희극배우로서 그가 보여준 영화 속 모습과 묘하게 어그러져 처연하다. 흑백사진의 행렬이 이어질 즈음 시선을 붙잡는 컬러사진은 슈퍼 히어로의 원조,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 촬영 현장. 스폰지 근육이 달린 수트를 입은 그가 스튜디오에서 하늘을 나는 장면을 촬영하는 중이다. 낙마 사고를 당했으나 의지로 삶을 이겨낸 그의 인생과, <할리우드랜드>의 슈퍼맨이 겹쳐지는 초상이라 쉽게 자리를 뜰 수 없다.
다섯번째 벽은 ‘배우&감독/배우or감독’이다. <오명>의 잉그리드 버그만과 히치콕, <엘레나와 그녀의 남자들>에서 키스 장면의 촬영각도를 설명하고 있는 장 르누아르 감독과 버그만과 멜 페레의 모습이 3장에 걸쳐 순차로 보인다. 그 자신이 감독이고 배우인 우디 앨런이 팔을 턱에 괸 모습, <쥘과 짐>의 프랑소와 트뤼포와 오스카 베르너 등 배우와 감독이 현장에서 나눈 당시의 열정과 긴장이 고스란히 담겼다.
마지막 벽, '영화, 야외를 거닐다'는 전시 중에서 가장 ‘매그넘’과 어울리는 장으로 배우, 감독 등 스포트라이트에 익숙한 피사체에서 벗어났다. 검정 나비넥타이를 맨 한 무리의 사진기자들을 담은 사진은 칸 영화제 취재열기를 대변하고, 영화제를 찾은 게스트를 위한 화려한 해변 파티장에서 뒷짐을 진 웨이터의 뒷모습은 텅빈 모래사장과 맞물려 황량하기까지 하다. 화려한 신주쿠에 위치한 고층건물의 대형화면에 <카사블랑카> 속 잉그리드 버그만이 스치는 거리는, 어제와 오늘이 만나는 접점을 셔터 스피드로 따라잡은 순간이다.
때론 에피타이저처럼, 혹은 디저트처럼
영화와 사진, 게다가 축제의 일부분이라 젊은이들의 전유물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영화제 전시담당 안용해씨에 따르면, 지역 주민 외에 전시장 위치를 물어 찾아오는 중년 관람객도 있고 젊은 시절 영화광이었음을 고백하는 노년층도 종종 보인다. 하기야 마릴린 먼로며, 오드리 헵번, 클라크 게이블은 그들의 젊은 시절에 웃음과 눈물을 준 배우들이 아니겠는가. 오드리 헵번의 시선이 아래로 향한 전시 포스터가 아련한 추억을 불러 전시장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가장 인기있는 작품은 뭘까. 예상대로, 오드리 헵번의 청순미와 마릴린 먼로의 인기는 긴 세월 퇴색되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전시를 통틀어 ‘의외로’ 인기있는 사진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포트레이트다. 짐짓 심각한 표정을 연출한 히치콕이 물고 있는 시가 끝에는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인다. 영화제 시작 전이라 한산한 전시장에서 만난 이영주 씨(30, 프리랜서)와 전현상 씨(32, 학원 원장)가 인상적인 사진으로 꼽은 작품이기도 하다. TV 광고를 보고 전시장을 찾았다는 이영주 씨는 지금까지 열린 전주영화제를 한 해 빼고 모두 출석했다는 영화마니아. 배우보다는 감독들의 사진들이 반갑고 신선하단다. 출근 전에 짬을 내 들렸다는 전현상 씨 역시 한때 좋아했던 영화의 감독과 배우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재미라며, 다만 대중이 다가서기 쉬운 형식의 전시였으면 하는 아쉬움을 밝혔다. 이어폰을 꼽고 한점 한점 음미하는 모습에 말 걸기 어려웠던 고은경 씨(학생, 26)는 영화와 사진에 관심있는 친구들에게 추천하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제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이미 800명 이상 다녀간 전시장을 나서며 전주 매그넘 영화 사진展이라는 제목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곳을 찾은 수 많은 발걸음들은 ‘전주’, ‘매그넘’, ‘영화’ 그리고 ‘사진’ 중 어떤 단어에 이끌렸을까. “따로 또 같이”라는 선거문구에나 어울릴 말이 정답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영화를 보면 스크린 밖 이야기가 궁금했고, 사진을 보면 액자 너머 카메라 쥔 손의 떨림이 낯설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이 특별식을 놓치지 마시라. 특별식이 부담스럽다면 애피타이저나 디저트로 생각하는 건 어떨까. 전시기간도 영화제 기간보다 앞뒤로 길어 5월12일까지 이어진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나기 전 심심한 입맛을 돋궈 줄 것이며, 영화제의 여운이 아쉬울 때 입가심으로 탁월한 선택이 될 것이다.
“더 맛있게 음미하라!”
전주 매그넘 영화 사진展을 더 알차게 즐기는 방법
1. 사진마다 우측에는 피사체에 대한 설명과 작가 정보가 나와있다. 알려진 이름들이야 걱정 없지만, 배우나 감독 이름이 작가와 섞일 혼돈이 있어 미리 알리면 상단에 위치하는 설명이 피사체, 하단이 작가다.
2. 전시 작품 84점 중 3점은 익숙한 얼굴이다. 81점은 2차 세계대전 뒤 성황을 맞이한 현대영화사 초기의 기록이고, 6개 장으로 나뉜 섹션 중 자기 자리를 찾아 걸린 3점은 다가오는 7월 열리는 매그넘 사진전 <<Present Korea>>에 전시될 작품 중 일부로, 영화 <M> 촬영 현장의 이명세 감독과 강동원, 문소리, 하정우의 모습이 그것이다.
3. 상영시간이 9시간에 달하는 라브 디아즈 감독의 <엔칸토에서의 죽음>은 이 전시의 입장객에 한해 무료관람이 가능하다. 5월2일부터 8일까지 매일 1회 상영되며, 전시장 한켠에 특별 상영 코너가 마련됐다. 영문자막이라는 점은 아쉽지만, 국내에서 이 영화를 만날 가능성을 생각하면 놓치기 아깝다.
4. 전시 관람료는 3,000원. 전시의 질과 규모를 감안하면 놀랄 만큼 저렴하다. JIFF 서포터즈 회원이거나 영화제 티켓 소지자는 1,000원 할인 혜택이 있다. 전시 사진이 수록된 도록은 300부 한정 제작됐고, 소장자의 마음대로 사진 순서를 바꿔 재구성이 가능하다. 가격은 일반 20,000원, 서포터즈 회원이거나 영화제 티켓 소지자는 18,000원.
5. 전시장 안에서 사진촬영은 금지돼 있지만, 입구에 걸린 <사브리나> 속 오드리 헵번과 기념 촬영은 가능하다. 청순한 그녀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겨보는 것도 영화제를 기억할 하나의 추억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