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특별기획 프로그램 중 하나인 ‘뉴 말레이시안 시네마의 세 가지 색깔’의 초청작은 총 9편이다.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 세 민족으로 구성돼 언어 역시 말레이어, 중국어, 인도어를 두루 쓰는 말레이시아의 특색을 반영한 ‘세 가지 색깔’이라는 표현은 다채로운 문화적 배경과 개성이 눈에 띄는 상영작의 면면을 함축하는 듯하다. 먼저 말레이시아의 길고 긴 역사와 복잡한 민족 구성원이 생소하다면 일본에 점령당하고 영국에 지배받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는 아미르 무함마드 감독의 <빌리지 피플 라디오쇼>가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 공산당>에서 비슷한 소재를 다룬 바 있는 독립영화감독 무함마드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지만 결국 타이 남쪽 마을로 쫓겨난 회교도 말레이인들을 세심하게 추적한다. ‘빌리지 피플 라디오쇼’라는 제목에 걸맞게 공산당원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차별받은 이들의 증언과 말레이 전설을 방영하는 라디오 드라마를 함께 엮어가는 구성이 흥미롭다. 별다른 참고 영상 없이 이들이 현재 머무는 타이 마을의 전경을 시종일관 담담하게 담아내지만 잔잔한 풍경 속에서 어느 순간 분노와 설움 등 복합적인 감정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정치적인 내용이 발단이 돼 말레이시아 내에선 상영금지되기도 한 문제작이다.
잔잔한 풍경 속의 비판적 통찰 <빌리지 피플 라디오쇼>
말레이시아 인도계 가정의 풍경은 디팍 메논 감독의 <댄싱 벨>에서 단편적으로나마 찾을 수 있다. 말썽만 일으키는 아버지를 내쫓은 어머니는 거리에서 꽃을 팔면서 댄서가 꿈인 성실한 딸과 사고뭉치의 싹이 엿보이는 아들을 도맡아 키운다. 내내 조마조마하던 아들이 사건을 일으키면서 이들 가정에 위기가 찾아오지만 그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서로에게 기대 삶을 이어간다. 반면 동거 중인 세 커플의 대화를 원컷 원신으로 대담하게 밀어붙이는 제임스 리 감독의 <사랑하고 싶어>는 말레이시아 도시 젊은이들의 일상을 추측할 만한 옴니버스 영화다. 이별 혹은 결혼을 고집스럽게 종용하다가 결국 현실에 안주하고 마는 극중 커플들은 말레이시아 가족 시스템의 변화를 대변하는 듯하다. <아름다운 세탁기>로 2005년 방콕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아시아영화상,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제임스 리 감독은 가족의 해체를 남녀의 현실적인 대화 속에서 의미심장하게 그려낸다. 연극 연출에서 영화 연출로 전향한 감독의 경력 때문인지 움직임이 적은 카메라, 단촐한 배경 세트, 극적인 대사와 배우의 움직임 등에서 연극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서정적인 <묵신>, 깜찍하고 유쾌한 <주머니 속의 꽃>
이에 반해 첫사랑의 추억을 세심하게 더듬는 야스민 아흐마드 감독의 <묵신>, 일에만 집중하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관계를 그린 셍 탓 리우 감독의 장편데뷔작 <주머니 속의 꽃>은 인종은 다르지만 천진난만하기는 마찬가지인 말레이시아 아이들의 세계를 묘사하는 작품이다. 우선 말레이시아의 아름다운 자연이 간간히 엿보이는 <묵신>은 인형놀이보다는 축구를 좋아하는 말괄량이 오케드의 유년에 집중한다. 한층 개방적인 가정에서 자라서일까. 또래 소녀들을 한심하게 여기던 오케드는 소년들과의 놀이에 끼고, 이를 계기로 만난 묵신이라는 소년과 가까워진다. 처음 느끼는 감정에 설레는 묵신과 달리 오케드는 간지러운 첫사랑의 열병이 귀찮기만 하다. 한편 아버지에게 소외받은 어린 형제의 세계를 담은 <주머니 속의 꽃>은 서정적인 분위기는 덜하나 보다 장난스럽고 유쾌한 어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학교에서 말썽쟁이로 낙인찍힌 리아와 리옴은 사실 일에 지쳐 쓰러져 잠든 아버지에게 이불을 덮어줄 정도로 어른스러운 아이들이다. 주워온 강아지를 정성껏 돌보던 그들은 곧 난처한 지경에 처하지만 이는 오히려 아버지와 소통하는 계기가 된다. 이밖에도 죽음을 두려워하며 불안에 떠는 소년을 소재로 한 호 유항 감독의 <죽을지도 몰라>, 아파트의 파란 지붕 위에서 세상 시름을 잊는 아파트 경비원 이야기인 우 밍진 감독의 <파란 지붕>, 사랑이라는 고리에 묶인 다섯 인물을 좇는 카비르 바티아 감독의 <사랑> 등이 말레이시아의 이국적인 정취를 담고 부산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