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이케 다카시의 <표류가>

때로 줄거리가 의미없는 영화가 있다. <표류가>가 전형적이다. 브라질에서 일본으로 온 한 남자가 중국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외국으로 도망치기 위해 야쿠자의 돈을 훔치려던 남녀는 점점 위험한 상황으로 말려든다. 일본 지명이 자막으로 깔리지만 배경은 미국이고, 헬리콥터를 타고 가다가 뛰어내리자 바로 그곳이 신주쿠가 나오는 등 황당무계한 설정과 프라모델 여인모형을 만드는 데 심취한 중국갱과 소리지르는 두목을 한번에 죽여버리는 야쿠자 등 상식을 뛰어넘는 설정과 사건들이 연속되며 B급영화의 ‘혁명’을 이루어내는 영화. 영화 곳곳에서 ‘주변부’의 재미를 한껏 느낄 수 있다.

대표적인 근대의 학문, 심리학을 공부하던 남자가 망상에 빠진다. 그는 타인의 마음을 조종하여 살인을 일으킨다. 알 수 없는 연쇄살인범을 쫓던 경찰은 자신의 마음조차 알 수 없게 된다. 90년대 일본공포영화의 걸작. <큐어>는 아주 천천히 범인의 뒤를 따라가면서, 나 자신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인지,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공포영화가 단지 충격효과가 아니라, 우리가 외면하고 있던 그 무엇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는 영화.

사카모토 준지의 <신 의리없는 전쟁>

70년대 후카사쿠 긴지가 만들었던 야쿠자영화의 걸작 <의리없는 전쟁>의 리메이크. ‘실록 스타일’의 전범을 만들었던 후카사쿠 긴지의 <의리없는 전쟁>이 야쿠자의 생성과 발전을 다루었다면, 사카모토 준지는 하나의 거대 조직으로 성장한 야쿠자 조직의 내부를 다루고 있다. 평범한 사람과 야쿠자의 우정을 그리면서, 철저하게 힘의 우위로 움직이는 야쿠자라는 조직이 얼마나 한심한지, 모래성 같은 것인지를 보여준다. 사카모토 준지의 영원한 테마 ‘폭력’이 조금씩 사회로 스며드고 있음을 증명한 영화.

아이돌 가수를 그만두고 배우로 전업해야 하는 소녀가 자의식의 혼란을 느낀다. 누군가 자신의 홈페이지를 만들고, 자신의 행적을 세밀하게 기록한다. 주변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자신도 위협을 느낀다. 심리스릴러로서 실사의 ‘리얼리티’를 능가하는 <퍼펙트 블루>는 곤 사토시의 대표작이다. 실사영화를 좋아했고, 영향도 많이 받았다는 곤 사토시는 <퍼펙트 블루>에서 환영과 실제의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소녀를 그리면서 우리가 보고 듣는 미디어로서의 실제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하라다 마사토의 <바운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도쿄로 온 여고생이 유학비용을 강탈당한다. 딱한 사정을 들은 고갸르들이 원조교제에 나선다. 군국주의에 찌든 노인, 고갸르들이 자신의 권익을 침해한다고 생각하는 야쿠자 등 일본사회의 다양한 ‘성인’을 만나며 하룻밤의 꿈이 흘러간다. 성인 남자와 데이트 혹은 섹스를 해주고 대가를 받는 원조교제. 일본의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던 원조교제를 10대의 관점에서, 그들의 곁에서 바라본 영화. 일본을 싫어했던 소녀는 고갸르의 도움을 통해 친구를 얻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올 용기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