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원고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쓰겠다며 참고자료를 부탁하자 영화사 관계자는 우스개를 던지며 우려를 표명했다. “그거 제목이 그래서 그렇지, 아줌마들 보는 영화 아냐. 시작하는 연인들 영화인데….” 난 “이거 왜 이래, 나두 ‘필’이 있어!” 하고 강변했고 즐거운 맘으로 극장을 향했다.
이야, 정말 너무 재밌겠다! 배우들두 대단하구… 사랑은 언제나 반경 200m 안에 있다구? 이 카피 너무 그럴듯하네… 게다가 제목 좀 봐. 여자친구나 애인이 아니라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구? 실은 나야말로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나한테 필요한 건 아내였는데 괜히 남편을 얻었지 뭐야. 자잘구레한 일들이 있을 때 “오늘 그거 꼭 좀 해줘”하고 나가버리면 그뿐이니 정말 편하겠지. 나는 버스 안에서 이런저런 공상을 하며 부푼 기대를 한껏 만끽했다.
근데 영화가 시작하고, 나는 온 정신을 내던져 공감할 준비가 다 돼 있는데, 전개가 되면 될수록 지루해지는 것이다. 조짐이 심상찮았다.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리 지루하지? 맘을 다잡아 몰입해보려 해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다음의 데이트 장면쯤으로 가서는 몸이 다 뒤틀릴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소외감 느껴지는데 이런 일종의 소격효과(?)를 극대화해준 것은 나를 제외한 다른 관객의 반응이었다. 커다란 상영실을 꽉 메운 관객은 웃고 즐거워하고 종영 뒤 밖에 나가면서도 온통 찬사 일색이었다. 어떤 게 그리도 재밌었나, 내가 순간적으로 졸았나 귀를 쫑긋 세우고 대화를 엿들었지만 다 나한테도 기억이 나는 장면들이었다. 이들은 원주의 대담함에 감동했고 스을슬 움직임을 감지해간 봉수의 변화를 사랑스러워 했으며 마침내 탄생한 새 연인을 축복했다.
누구 같이 간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야, 솔직히 별루 재미없지 않니?” 하구 슬그머니 동의를 구해볼 텐데 이건 뭐, 영화를 보고 희희낙락해 하는 연인들의 무리를 빠져나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인파에 밀려 황황히 버스에 몸을 싣는 것뿐이었다.
나는 변명이라도 하듯이 다시 공상무아지경에 들어갔다. 사랑이란 건 원래, 옆에서 보긴 구차한데 주인공들 입장에서만 마구마구 재밌는 거니까. 버스 안에서 서로 쥐포 뜯어 먹여주는 연인들이나 기차 안에서 취한 남자애 얼굴에 자기 얼굴을 묻고 자는 여자애를 볼 때처럼, 남들 보기엔 그저 그렇거나 심지어는 심란해도 자기들은 너무너무 즐거운 일종의 버추얼 리얼리티 게임이니까 뭐. 그러니까 봉수랑 원주는 나뭇잎이나 뜯고 사람인(人)자 써서 잡아먹는 놀이나 해도 너무너무 행복한 거구, 옆에서 보는 구경꾼한테야 너무너무 심드렁한 거구, 그래봤자 그 연인들 행복전선엔 아무런 상관없구, 그런 거지 뭐. 그러나 그걸로는 스스로에게 변명이 잘 안 됐다. 좀더 그럴듯한 이유를 찾던 나는 생각이 결국 다른 데로 미쳤다. 문제는 ‘일상’이었다.
세상에는 써놓고 논할 때는 무지 멋있는데 직접 처해보면 멋있기는커녕 구질구질 그 자체인 것들이 있다. 고독이 그렇고 절망이 그렇고 우수, 비애, 씁쓸함 등이 다 그런 부류인데 그중에서도 표리부동의 대표케이스가 바로 이 ‘일상’이라는 녀석이다. ‘일상’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다루던 학자나 예술가들이 새롭게 착목해 연구와 창작의 영역 안으로 끌고온 녀석이라는데, 그게 참 그렇다. 학문을 하고 작품을 짓고, 그 자체로서 범상치 않은 활동을 하던 이들이 볼 때는 온통 신선하기까지 한 모양이지만, 그 일상을 바로 ‘살고’있고 그 일상을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없는 나 같은 필부가 볼 때는 지루하다못해 황당한 그 무엇이다. 매일매일이 다람쥐 쳇바퀴 같다고 말버릇처럼 다들 되뇌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도 만나고 다른 메뉴도 먹고 조석으로 변하는 길거리 구경이라도 하는 보통사람들, 돌아다니며 가끔은 화려한 가게도 발견하고 상큼한 돌발사건도 생기는 보통사람들은 모처럼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상이 재미나기도 하겠지만 사회의 특수층(?)인 전업주부 아줌마 계층한텐 그렇지가 못하다.
그건 바로, ‘비 사이로 막가’라는 오랜만에 듣는 유머가 하도 썰렁하고 고전적이라서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보통사람과, 늘 요즘도 듣는 게 그런 유머라서 “나두 그거 아는데” 정도의 반응밖에 못내보내는 특수인간과의 차이다. 보습학원과 은행이 엇갈리게 마주보고 있는 작은 거리를 보며 “참 정겨운 동넷길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보통사람들과, 오늘도 바로 그 거리를 지나며 장보고 세탁물 찾아왔던 특수인간과의 차이다. 오늘이 어젠지 내일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일상 속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신선한 기분으로 만끽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던 것이다. 일상에 파묻혀 있는 사람에게 예술소재로서의 일상이란 너무나 무겁다. 그것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2>의 초호화 장비들이나 <러브 오브 시베리아>의 초드라마틱 사랑을 감상하는 것보다 훨씬 사치스런 일이었던 것이다.
오은하/ 대중문화평론가shimba@dri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