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한국의 모든 연예인을 FA로 풀어놓고, 프로야구 드래프트 하듯 한 명씩 뽑을 수 있다면 당신은 누굴 선택하겠는가? 아마 기획사의 운영방침에 따라 고를 사람이 다르겠지만, 필자라면 비를 뽑겠다. 물론 그는 아직 가수 / 연기자 각 부분의 명실상부한 톱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필자처럼 돈 한 푼 없고, 귀차니즘으로 가득한 사람이라면 비를 뽑는 게 좋다. 어차피 알아서 잘 할 테니까.
비가 한국에서 가장 춤을 잘 춘다거나, 연기를 잘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묘하게도 어디에든 던져놓으면 '뭔가 되는' 힘이 있다. 그게 바로 그의 역사다. 솔직히 '나쁜 남자'를 부를 때 비의 모습을 보고 지금의 비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나? 그는 JYP에서 만들어낸 또 하나의 컨셉 가수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안녕이란 말 대신'이 BGM으로 깔린 CF에서 '나쁜 남자'에 묻혀있던 자신의 귀여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더니, 누구나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KBS <상두야 학교가자>에서 거의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로 드라마를 살려냈다.
또 2집의 '태양을 피하는 방법'은 노래 자체가 여타 한국의 히트곡들과는 달리 화끈하게 터져주는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서서히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노래였기에 히트가 쉽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퍼포먼스와 '몸', 그리고 자신의 보컬 톤으로 그 노래에 섹시함을 불어넣었다. 그 다음은? <풀 하우스> 이후 그는 드라마 캐스팅 1순위가 됐고, 3집 'It's raining'은 그의 앨범 중 실질적으로 가장 성공했다.
It's raining
'It's raining'의 뮤직비디오는 그가 어떤 캐릭터인지 그대로 보여준다. 'It's raining'은 이승환의 '당부'와 '심장병'등의 작품과 더불어 한국에서 아시아적인 수준을 넘은 몇 안 되는 작품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완성도는 도저히 국내 수준이라고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세트와 조명의 영향이 크지만, 이 뮤직비디오를 이끌어가는 것은 결국 비이다. 뮤직비디오에서 그는 냉소적인 분위기가 흐르던 클럽을 자신의 춤으로 열광적인 분위기로 바꿔놓는다. 이는 뮤직비디오의 내용일 뿐만 아니라, 뮤직비디오의 실제 흐름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가요 프로그램의 무대 이상으로 오직 비의 춤만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비의 춤이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 공중에서 물을 뿌려주며 모든 감정을 폭발시킨다.
만약 비의 춤이, 그리고 그 춤을 잡아낸 카메라가 조금이라도 어설펐다면 이 뮤직비디오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무대건, 그는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만으로 스물 셋이다. 소속 기획사가 황당할 정도로 굴려먹지만 않는다면, 비는 지금의 자리에서도 '미래'가 남아있다.
비의 콘서트 <Rainy Day> 역시 가히 '무대에 던져놓은 비'라고 할만 하다. 이 콘서트에서 백댄서의 군무라든가, 화려한 이벤트 같은 것은 거의 없다. 오직 비 혼자서 무대를 이끌어간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곡 중간마다 여러 멘트로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는 MC도 됐다가, 여성 관객들의 남자친구 역할도 하며,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몸도 실컷 보여줬다가, '익숙치 않아서' 같은 곡에서는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는 순수한 청년이 되기도 한다.
콘서트의 대부분은 비가 정말 '혼자' 무대를 이끌어가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I do' 이후 '난'까지 혼자 비까지 맞아가며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부분은 순수한 비의 원맨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콘서트 자체가 비를 보러 온 관객들이 대부분인 탓도 있겠지만, 다른 이벤트적인 요소 없이 그 넓은 무대를 혼자의 춤과 노래만으로, 그것도 한 두곡도 아닌 무대의 대부분을 이렇게 소화할 수 있는 역량만큼은 인정해줘야 할 듯싶다. 저 정도 하드웨어를 가진 인물이 계속 '라이브'로 노래 부르며 춤추는데 시선이 안 가는 것도 힘든 일 아니겠는가(순수한 가창력이라는 부분은 제외하고라도, 라이브하면서 퍼포먼스를 전개해나가는 부분에서는 비와 세븐 모두 한국인의 기준에선 일종의 신인류를 보는 기분이다).
혼자만으로 안되는 게 있지
그러나 이는 고스란히 <Rainy Day>의 단점이 된다. 비의 원맨쇼는 각각의 곡들에서는 멋지지만, 이는 그만큼 톱스타의 콘서트에서 기대할 수 있는 이벤트나 여타 비를 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쇼적인 장치가 부족했음을 뜻한다. 실제로 이 콘서트에서 지원되는 가장 화려한 무대장치는 불꽃놀이나 하늘에서 비가 봉을 잡고 내려올 수 있도록 하는 정도가 전부다. 그래서 콘서트는 비가 화려하게 무대에 내려오는 'It's raining'을 부르기 전까지는 모두 비슷비슷한 흐름으로 전개 되어 공연의 흐름이 너무 평이하게 느껴진다.
최소한 한두 명의 깜짝 게스트나 새로운 편곡, 혹은 여자친구 찾기 같은 관객 대상의 이벤트 외에 음악과 연결된 이벤트가 있었다면 공연이 좀더 다채롭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비의 무대 매너와도 연결된다. 비는 원맨쇼를 통해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긴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비에게서 기대하는 퍼포먼스는 아니다. 물론 비의 모습을 실컷 볼 수는 있지만, 각각의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라이브로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큰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비가 '태양을 피하는 방법' 이후 보여준 몇몇의 무대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단지 춤 솜씨 때문이 아니라 그 춤을 정해진 컨셉 안에서 절묘하게 연결 시켰다는 점이었는데, 이번 콘서트에는 그런 기막힌 퍼포먼스가 없다. 콘서트 초반 3D로 만들어진 도시 배경과 비의 춤을 조화시킨 정도가 눈에 띈다.
첨가된 부록들을 보니 바쁜 시간 쪼개서 자신이 직접 많은 부분에 참여한 듯한데, 그 노력은 인정해야겠지만 공연 기획에 보다 도움을 줄 수 있는 디렉터를 영입해서 보다 다양한 무대를 꾸몄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화질과 음질은 이승환의 <끝장> 같은 세계수준의 레퍼런스 타이틀에는 많이 미치지 못하지만, 깨끗하고 선명한 느낌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공연의 사운드 자체가 여러 샘플들이 쓰일 뿐만 아니라 저음이 굉장히 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운드들이 모두 잘 분리되어 소리가 뭉친다거나 함성에 묻힌다거나 하지 않는다. 또한 영상 역시 많은 보정작업을 했는지 깨끗하고 선명한 색감을 전달하며, 거칠거나 깨지는 화면도 없다.
하지만 이런 선명함의 추구는 이 공연이 라이브 콘서트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인공적인 느낌이 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운드는 전체적으로 관객의 함성소리와 섞이지 않고 선명하게 부각 되어 소리를 듣기는 편하지만, 공연장 전체로 힘 있게 퍼지지 않아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하진 못한다. 비의 보컬은 5.1 채널을 기준으로 들을 때 다른 사운드보다 더욱 부각되어 그의 목소리만을 놓고 보면 숨소리 하나하나까지 (그래서 격렬한 춤을 출 때 조금 힘에 달리는 그의 목소리까지) 잡아내지만, 다른 사운드와 완벽하게 조화되진 않는다. 비라는 이름값이나 국내 수준을 생각해보면 부끄러울 것은 없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도 아닌, 딱 '퀄리티 스타트' 정도를 보여준다.
어쨌건, 비는 계속 내린다
하지만 국내 음악 타이틀 시장 자체가 음악 타이틀에 넓은 관심이 있는 컬렉터가 주도하기보다는 특정 뮤지션의 팬들이 주도하는 것을 고려하면, <Rainy Day>는 비의 팬들에게 충분히 만족스러울만한 타이틀일 것이다. 콘서트 제목 그대로, 정말 '비의 날' 같은 느낌이 느껴질 정도로 비가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타이틀이니까. 비의 춤 연습장면이나 인상적인 무대가 수록되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콘서트 연습과정을 담은 부가영상 역시 나름대로 흥미롭다. 뭐, 어쨌건 다음 콘서트나 DVD 타이틀은 이보다 더 나아지지 않겠는가. 어차피 던져 놓으면 알아서 살아 돌아올 친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