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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종상
2001-05-30

편집자

다시 제38회 대종상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종상 문제를 다룬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끝부분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우리집 텔레비전 수상기는 사랑받아 마땅한 우리의 대종상이 신구세대의 갈등에 희생이 되고 말았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세대간의 화합을 강권하고 있었다.

정말 대종상은 세대갈등에 상처입은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보면 대종상의 역사는 온갖 로비설과 음모설이 서식해온 어두운 터널이었다. 오죽하면 당대의 활동성 높은 영화인들이 대종상을 거부하자는 집단적 움직임을 두어번씩 되풀이했을까. 불공정심사 의혹으로 상처입고, 운영비조차 마련 못해 해걸이를 하는 수모까지 당한 상. 철지난 냉전논리로 냉전이데올로기에 찌든 당국의 검열을 통과한 영화조차 빨간 딱지를 붙여 시상대 진출을 막던 상. 빛나는 영화의 싹을 발견할 힘을 잃은(아니면 시력이 애초부터 없었던) 노안을 과시하던 상. 빈사 상태의 대종상을 새숨을 불어넣어 긴급구조해온 건 언제나 영화였다. 대종상은 이따금 상 자체와 무관하게 뻗어나가는 한국영화의 뿌리를 잡고 자기가 파놓은 함정을 벗어나곤 했으니까. 대종상의 생존력은, 그래도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상을 갖고 싶다는 영화인들의 소망과 하루저녁 스타탄생의 경주를 기다리는 우리들의 욕망에서 나오는 건 아닌지. 신구가 화합하여 대종상을 살리자는 제안 역시, 대대적인 기획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그런 소박한 바람의 표현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은 대종상 문제의 본질을 비껴간 오답이다. 영화상이란 어떤 의미에서건 일종의 비평적 기능을, 영화의 가치와 의미를 나름대로 읽어내 관객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마련이다. 발견하고, 선택한 영화를 옹호하고, 격려하는 것, 그 일을 제대로 했느냐 못 했느냐가 그 상의 정당성을 결정한다. 올해 인터넷을 통해 관객들 사이로 유례없이 빠르게, 폭넓게 번져간 대종상 시비는 바로 그 역할에 관한 부정적 평가에서 비롯됐다. 왜 대종상은 그런 결과를 보여주었는지, 누구 또는 무엇 때문인지를 정확하게 갈라보는 대신 ‘아버지에게 효도를!’만을 외친다면, 상처는 속으로 곪아들어갈 뿐이다.

무슨 희망으로 대종상을 다시 얘기하느냐는 힐난의 소리도 들린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대종상의 자랑스럽지 못한 수명연장에 일조하고 있는 셈이니 책임을 면하기 어렵겠다. 그러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종상의 문제를 근본부터 다시 점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