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에 대해 글을 쓰다보면 가끔 범하는 오류가 있다. 만화나 동화가 원작인 작품을 소개할 때 원작자를 감독으로 착각하는 경우이다. 쉽게 말하면 <아마겟돈>이나 <아기공룡 둘리>의 감독을 원작자인 이현세와 김수정이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원작자가 애니메이션 작업에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으면 별로 문제가 없는데, 대개 캐릭터 설정이나 각색, 제작, 또는 총감독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 종종 이런 혼동을 일으킨다.
애니메이션 담당 초창기 때 <은하철도 999>의 원작자로 극장판과 TV 시리즈의 시나리오, 캐릭터 디자인, 제작, 감수 등 각종 분야에 마쓰모토 레이지를 극장판 감독이라고 잘못 소개했다가 한 독자로부터 단단히 훈수를 듣기도 했다. 사실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 감독은 린 타로이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이면 텔레비전에서 자주 소개되는 <스노우 맨>이나 <파더 크리스마스> 같은 애니메이션도 혼동을 일으키는 작품들이다. 두 작품 모두 영국의 유명한 동화작가 레이몬드 브릭스의 동명 동화가 원작인데, 종종 애니메이션 감독도 레이몬드 브릭스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레이몬드 브릭스가 애니메이션 스토리와 캐릭터 디자인에 관여했지만, 감독은 ‘지미 데루 무라카미’(Jimmy Teru Murakami)가 맡았다.
애니메이션을 꽤 안다고 자부하는 팬들에게도 조금 낯선 이름인 지미 데루 무라카미는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애니메이션 작가이다. 33년 미국 캘리포니아 산 호세 태생이니까 이제 우리 나이로 67살인 노장 작가이다. 그의 작품 스타일은 그가 젊은 시절 UPA에서 일했다는 것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디즈니의 안온한 가족주의와 틀에 박힌 그림에 반기를 든 작가들이 스튜디오를 나와 결성한 ‘UPA’의 모토는 ‘애니메이션은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니다’였다. 사회적인 풍자나 어른들이 즐길 수 있는 성적 유머도 담을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정치적인 메시지도 담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UPA에 오래 몸담지는 않았지만, 무라카미의 작품에는 그런 반골정신이 배어 있다.
무라카미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뒤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등을 돌아다니며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제작했다. 이 시절 미국에서 건너간 많은 B급 영화감독과도 교류를 가졌는데, 그중 한명이 로저 코먼이다. 국내에서도 출간된 로저 코먼의 자서전을 보면 자신의 영화에서 공중촬영감독으로 활약했던 무라카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무라카미는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67년 <속삭임>으로 앙시페스티벌 대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72년부터는 아일랜드 더블린에 자신의 스튜디오인 ‘무라카미 필름’을 세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 <스노우 맨>을 비롯해 몇편 되지 않는데, 최근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바람이 불 때>(When the Wind Blows)가 영국 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소개돼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스노우 맨>과 <파더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레이몬드 브릭스의 동명 동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내용은 앞선 두편과 전혀 다르다. 앞의 두편이 유년 시절의 추억이나 꿈을 귀엽고 친근감 넘친 캐릭터로 표현했다면, <바람이 불 때>는 그처럼 귀엽고 친근한 캐릭터를 통해 핵전쟁의 잔인함과 공포를 비판한 사회성 짙은 작품이다. 2차대전을 겪은 짐과 힐다라는 노부부의 모습을 통해 감독은 관료주의의 허구성과 이데올로기와 정권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에 죽을 수 있는 핵전쟁의 무서운 모습을 얄미울 정도로 차분하고 절제된 톤으로 그리고 있다. 시각적으로 현란한 그래픽이 등장하거나, 긴박감 넘친 움직임과 편집으로 긴장감을 높이는 것도 아니다. 마치 아이들 머리맡에서 동화를 들려주는 잔잔하고 편한 어조로 말하는 전쟁의 잔인함은 목소리 높인 구호보다 더 절실하게 와닿는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oldfie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