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독과 영화는 서로 닮게 마련”이라는 말은 <인디안 썸머>를 만든
노효정 감독에게도 적용된다. 차갑고 딱딱할 수밖에 없는 법정을 매개로 뜨겁고 축축한 사랑이야기를 담아낸 <인디안 썸머>처럼 그는
“무협지에서 열사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보며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성적이라면서도, 정작 자신의 영화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는 여느 영화평론가
못지않게 냉정한 시선을 유지했다. 그는 기자가 영화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려 하면, 마치 알고 있다는 듯 “그게 참 아쉽더라, 내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기도 하고”라며 선수를 뒀다. 어쩌면 그의 ‘자아비판’은 우리 나이로 마흔한살이라는 만만치 않은 연륜에서 비롯되는 여유일
수도, 개봉 첫 주말 흥행 7만여명을 동원한 자신감의 결과였을 수도 있지만, 그 태도만큼은 첫 시험을 치른 뒤 꼼꼼하게 답을 맞춰보는 초등학교
1학년생의 태도마냥 진지한 것이었다. 영화아카데미 2기생으로 졸업한 뒤 86년 화풍흥업에서 ‘충무로밥’을 먹기 시작한 그는 그동안 한국
법정드라마의 가능성을 열었던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를 비롯,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원한
제국> 등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해왔다.
<인디안 썸머>는 멜로영화지만 법정드라마가 녹아든 독특한 구성이다. 어떻게 구상한 것인가.
한 2년 반 정도 됐다. 우노필름(현재 싸이더스)에서 영화를 만들기로 했을 때부터 멜로드라마는 일종의 전제조건이었다. 그리고 어떤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캐릭터를 등장시키자는 것은 당시부터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변호사와 사형수의 이야기로 가닥을 잡았고 임상수 감독이 초고를
썼다. 임 감독은 나와 호흡도 잘 맞고 독특한 캐릭터를 잘 만들어나간다는 점 때문이었다. 막상 초고가 나왔을 때 그것은 너무나도 임상수적인
색깔이었다. 지금 영화와 비교한다면, 육체적인 사랑을 굉장히 강조했달까. <베티블루>처럼 절망에 다다른 남녀가 육체에 탐닉하는
성격이어서 손을 봐야 하는 상태였다. 결국 14번을 고치며 별별 이야기를 다 만들어본 끝에 최종 시나리오를 결정했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를 통해서도 잘 짜여진 법정드라마를 보여줬는데 이쪽에 관심이 많은가보다.
<단지 그대가…>의 경우 초고는 이윤택씨가 썼고, 그뒤 당시 조감독이던 이성수 감독이 이어받았는데도 답이 안 나왔다. 영화를
엎으려는 찰나, 당시 기획을 맡았던 신철씨가 해결사를 투입한다며 날 불러 시나리오를 쓰라고 했다. 이미 앞의 사람들이 자료정리를 잘해놓아
딱 열하루 만에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서도 못 읽어봤고 법정에도 한번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았다. 사실 개인적으로
법정영화를 좋아하며 관심도 많았기 때문에 꼭 제대로 된 법정영화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법정장면이나 대사 등은 생생하더라.
6개월 정도 매일같이 법정을 출근하다시피 나갔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은 사건의 성격에 관계없이 천편일률적이더라. 그렇게 오랫동안 출입한
것은 법정과 친해지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 피고, 검사, 판사, 변호사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특히 남자주인공인 서준하가 변호사이다보니
법정에서 괜찮아보이는 변호사를 만나면 취재대상이 돼달라고 부탁을 했다.
법정드라마와 멜로라는 이질적 요소를 한데 녹이는 것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솔직히 어려웠다. 법에 대해 이상적인 관념을 갖고 있는 준하가 현실적 법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이신영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되면서 그 법을 부정하게 되고, 그를 사랑하게 된 신영은 그것을 다시 돌려놓으려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중심축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 이것저것
재미있는 살을 붙이려 했다. 하지만 막상 편집본을 만들어놓고보니 2시간40분이 됐다. 사실 1시간40분 안에 중심축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담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결국 전반부의 재판장면을 스피디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또 젊은 변호사들의 동성애라든가 여타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는데 버려야 했다. 물론 법정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온다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의 재미는 있겠지만 결국 멜로라는 틀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했으므로 이쪽에 포커스를 맞춰야 했다.
그동안 시나리오를 줄곧 써왔지만, 연출은 장현수 감독의 <걸어서 하늘까지>의 연출부 세컨드 경력밖에 없다. 시나리오 작가라는
이력이 연출을 하는 데 어떻게 도움을 줬나. 그리고 어떤 점이 어려웠나.
우선 어려웠던 것부터 말한다면, 드라마를 많이 쓰다보면 구성이나 틀을 갖추는 데 가장 큰 신경을 쓰게 된다. 한데 막상 현장에 가보니
그러한 논리적인 해석보다는 감성적 해석이 더 필요할 때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장점이라면 전체적인 흐름을 놓치지 않는 점을
들 수 있다. 매일 조금씩 시나리오를 고치고, 새로 쓰곤 했는데 앞뒤부분에 맞게 연결시키는 과정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연, 박신양이라는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는지.
박신양은 대단한 집중력을 보여줬다. 이미연은 어떻게 표현하면 화면에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를 잘 알고 있는 배우다. 아쉬운 것은 이미연이
법정에서 최후진술하는 장면을 뺀 것이다. 연기가 굉장히 훌륭했는데…. 보는 사람에게 너무 감정을 강요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제작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장면은 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고생한 미연씨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죄수치고 이미연은 너무 예쁘게 나온다는 느낌이 든다.
나도 그 점이 어렵더라. 이런저런 의상을 입혀봤는데, 단색의 죄수복이 참 잘 어울리더라. (웃음) 기본 메이크업도 못하게 했는데 그렇게
예쁘니 어쩔 수가 있나.
‘늦가을의 봄날 같은 화창한 날씨’ 또는 ‘평온한 만년’을 의미하는 제목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가 영화 속에 드러나게 표현되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웠다.
신영이 출소해 두 사람이 만나는 부분을 강조하지 못한 것 같긴 하다. 생각해보면 그 순간은 둘에게는 너무나 절박한 때였으니까 좀더
배려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우선 영화를 찍으며 디테일한 감정을 잡아내지 못했다. 내 능력이 모자란 탓이었을 게다. 또 이야기가 제 색깔을
갖기 위해서는 둘이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하는 이야기를 모두 담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결국 초점을 두 사람이 헤어지는 곳에 놓고 그
과정을 담는 데 주력했다. 둘의 이별은 외양상으로는 관계의 끝이지만, 드라마 내적으로나 멜로 코드 차원에서나 신영과 준하의 사랑이 완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힘을 싣다보니 멜로 형성 과정이 약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고보니 준하가 신영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계기가 잘 보이지 않았다.
준하의 과거 사건을 통해 신영에게서 연민 또는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연결고리를 만들어줄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뒷부분
이별을 강조하려다보니 앞부분까지 상세하게 풀어가기에는 부담이 있었다. 만남과 사랑장면의 부피를 키웠다간 정작 뒤에 가서 감당하기 어렵지
않겠나 싶었다. 그래서 둘의 첫 만남장면을 고속으로 찍어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려는 ‘유혹’도 느꼈지만, 닭살이 돋으며 ‘내가 미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그리고 사람마다 사랑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그저 눈길이 스치는 것으로도 사랑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수십번 만나고 얘기해야 사랑이 된다고 한다. 또 감정이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도 어려운 것 같다.
애초 시나리오에는 준하와 신영의 정사장면이 나오는데 정작 영화에서는 뺐다.
그 부분을 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 두 사람이 처절할 정도로 함께 있고픈 심정을 담는 데 키스장면을 넣느냐 정사장면을 넣느냐를 놓고서.
결론은 정사장면을 집어넣는다면 관객을 너무 멜로적인 감정에 빠뜨릴 수 있다, 즉 비슷한 감정을 지나치게 중복해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쪽이었다.
멜로적인 코드를 의도적으로 제거한 부분도 느껴지지만, 마지막 법정 문이 닫히는 장면은 신파적인 느낌을 준다.
멜로라면 어떻게든 신파성을 가져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 장면의 경우 제작진 사이에서도 좀더 늘려야 한다는 주문이 나오기도 했다.
관객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아무튼 멜로영화는 참 연출하기 힘들다. 드라마나 구성보다는 연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 그러다보니
시간계산도 어렵다. 배우마다 호흡이 다르다보니, 내가 15초짜리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장면도 감정이 느껴진다 싶게 찍고 보면 40초가 되더라.
첫 작품이라 애착도 많을 텐데 비교적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 같다.
편집, 믹싱을 끝낸 뒤 개봉까지 보름 정도의 기간 동안 나 자신을 최대한 객관화하려 애썼다. 관객과 기자, 평론가들의 평가가 나오기 전에
내가 먼저 내 작품을 평가해보고 싶었다. 그래야 평가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있고, 객관적으로 설득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작품을 만들어놓고나니 마치 배설한 것 같은 느낌이다. 시원하기도 하고. 아이의 건강을 체크하려면 변을 잘 봐야 한다는 모 분유광고처럼,
어디에 장점이 있고 무엇이 단점인가를 꼼꼼히 바라보려 한다.
그래서 장점과 단점을 파악했나.
아무래도 난 감정에 호소하는 이야기보다는 이성에 호소하는 쪽이 잘 맞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법정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캐릭터마다 각자의
입장이 있고 그것이 팽팽히 맞선다는 점 때문인 것 같다. <인디안 썸머>의 경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부분이 20% 정도 되는데,
만약 다음에 영화를 만든다면 40% 정도로 끌어올릴 생각이다. 이상한 점이 있다면 내 성격은 그리 이성적인 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상당히 감상적인데…. 87년인가, <장길산> 7권인가 8권인가에 마감동이 눈밭에서 싸우다 죽는 장면이 나온다. 그 부분을 읽고
나니 너무 슬퍼져 주위 사람들을 불러 마감동의 제를 지내고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웃음)
구상하고 있는 다음 작품이 있는지.
개봉날 싸이더스 차승재 이사가 다음 작품에 들어가자고 하더라. 구상은 대충 해놓았는데 제목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될 것이다.
아직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자기 일에 신념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글 문석 기자 사진 오계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