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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폴라감독 구하기 - 칸 의 22년 애정
2001-05-12

<대부>로 너무도 잘 알려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62) 감독은 칸과 인연이 깊다. 지난 9일 개막한 제54회 칸영화제는 79년 <양철북>과 함께 황금종려상을 공동수상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 '디렉터스 컷'(감독 편집본)을 특별상영하는 행사를 11일 열었다. 코폴라는 이 편집에 무려 6개월의 시간을 들였고, 개봉당시 상영시간 153분에서 53분이 더 늘어났다.

코폴라 감독은 "역사적 관점을 더욱 분명히 해 주제를 보다 명료하게 하면서도 복잡다단하게 만들었다"며 "당시 아주 혹평을 받았던 결말은 이번에도 그대로 남겨 두었는데, 이번 판본에선 그 결말이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프랑스의 플랜테이션 농장운영 장면을 새롭게 넣어 50년대 프랑스에서 있었던 식민지 정책에 대한 항의와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 내부의 반대운동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효과를 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칸은 코폴라의 아들인 로만 코폴라의 감독 데뷔작 <시큐>를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해 이들 집안에 겹경사를 안겨주었다.

79년 이 영화가 칸영화제에서 수상했을 때도 코폴라 감독에게는 구원의 의미가 있었다. "당시에 이 영화가 볼 수도 없고 쓸모도 없는 재난이 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미국 언론들은 끊임없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조건에서 영화를 만드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고, 나의 유일한 대답은 영화를 완성해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촬영이 끝나기도 전에 칸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칸이 나를 구했다."

68년 '진보' 물결 대응 못해 영화제 못 열려

칸은 자칫 지옥 속으로 떨어질 뻔했던 <지옥의 묵시록>을 살려냈지만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독립성과 특유의 자존심을 지키며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가 되기까지 칸의 뒤켠에는 예기치 않았던 일화들이 몇가지 더 있다.

1954년 할리우드 스타 로버트 미첨과 미국 여배우 시몬 실바가 칸 해변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은 뜻하지 않은 스캔들을 일으켰다. 실바가 토플리스 차림이었던 것이다. 손으로 가려 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도 아니었지만 영화제는 실바에게 칸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실바는 곧 할리우드의 윤리위원회에 회부됐고 일자리를 사실상 박탈당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우는 자살했다.

1962년 이탈리아 영화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 루키노 비스콘티, 비토리오 데 시카, 모니첼리 등 4명의 감독이 각각 만든 단편을 모은 <보카치오 70>가 영화제의 초청을 받았다. 하지만 조직위는 영화가 너무 길다고 생각했고, 모니첼리의 작품을 삭제해버렸다. 이에 로셀리니는 물론이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이 항의의 뜻으로 칸 방문을 취소했고, 일부 심사위원이 사임하기도 했다.

1968년 5월 학생혁명의 열기는 칸을 비켜가지 않았다. 영화제가 열릴 즈음, 프랑스 누벨바그를 이끈 프랑수아 트뤼포와 장 뤽 고다르를 선두로 수많은 청년영화인들이 영화제 본부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기존 제도와 관습에 반기를 든 정치적 진보의 바람이 안이한 영화제 운영에 역풍을 일으킨 것이다. 로만 폴란스키 등 상당수 심사위원들이 이에 동조해 심사위원직을 사임했고, 개막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상영이 `물리적 방해'로 좌절됐다. 결국 이 해의 영화제는 열리지 못했다.

칸/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